12월 28일은 나석주 의사 순국일이다. 그의 기일을 맞아 나석주 의사 관련 자료들을 토대로 '그날의 거사'를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기자말] |
나석주가 거사용 폭탄을 확보한 때는 1926년 5월 초순이었다. 그 무렵은 김창숙이 자신의 고향인 경상도로 잠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다가 돌아온 직후였다.
"내가 작년 말(1925년 12월) 국내로 들어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보았지만, 기대와는 전혀 동떨어진 성과를 거양했을 뿐이오. 목표가 20만 원이었는데 겨우 3,350원밖에 아니 모였으니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조차 모를 지경이오."
한탄을 하는 김창숙을 바라보며 류자명이 묻는다.
"선생께서는 우리의 독립운동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 옳다고 보시는지요?"
김창숙이 말한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이 독립운동의 결의를 북둗우고 친일 잔당들의 기세를 억누르는 일이오. 국내에 결사대를 파견하여 적의 주요 기관을 파괴하고, 비협조적인 친일 부호들을 응징해야 하오. 지금은 3,350원밖에 없는 형편이지만 이 돈을 활용해서라도 거사를 도모해야겠소."
김창숙과 류자명은 천진 프랑스 조계의 한 여관에서 나석주를 만나 폭탄 세 개를 건넸다. 그 폭탄은 신채호가 언젠가 거사에 쓰려고 애지중지 보관해온 것들이었다. 폭탄을 건네받으면서 나석주가 류자명에게 물었다.
"단재 선생께서는 잘 지내십니까? 뵌 지가 언젠지 그것조차 까마득할 지경입니다만..."
"그렇군요. 세월이 너무도 빨리 흐릅니다. 이룬 것도 없이 시간만 소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나석주가 북경에서 신채호와 류자명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한 때는 1924년 초였다. 따라서 김창숙이 지금 류자명이 보는 앞에서 신채호가 보관해 온 폭탄을 나석주에게 주고 있는 것은 네 사람의 인연이 얽히고설킨 결과인 셈이다.
신채호가 보관해온 폭탄을 받은 나석주
신채호가 자식처럼 아껴온 폭탄들을 김창숙과 류자명이 나석주에게 준 데에는 김구의 추천도 한몫을 했다. 김구는 이동녕이 동석한 자리에서 김창숙으로부터 국내에 열혈 지사를 파견해 일제의 주요 기관에 투탄을 하려 계획 중이라는 말을 듣고는 바로 나석주를 천거했다. 김구는 구한말 황해도에서 교육 운동을 할 때부터 나석주의 인간 됨됨이와 의열 투쟁에 대한 열망을 잘 알고 있었다.
1876년생인 김구는 우리 나이로 29세 되던 1904년 무렵부터 교육 구국 운동에 투신했다. 그 후 3년이 지나 1907년이 되었을 때 안악의 양산학교가 그를 교사로 초빙했다. 안악은 황해도에서 신교육 운동의 중심지였다. 김구는 양산학교의 소학교와 야학과를 담당했는데, 이미 나석주는 향촌의 보명학교 고등과를 졸업했으므로 양산학교에 와서는 중학부에 적을 올렸다.
김구는 학교 안에서도 물론이었지만 나석주의 고향마을인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나무리에 내왕할 일이 있을 때에도 거기서 나석주와 즐겨 만났다. 그만큼 나석주는 김구의 애제자였다. 그러나 김구가 나석주를 한참 동안 만나지 못한 시기도 있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전후한 몇 달 동안이었다.
나석주는 김구의 교육운동 시절 제자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자 일제는 관련자로 지목한 조선인들을 대거 체포했다. 이때 김구도 해주 감옥에 투옥되었다. 몇 달 후 김구가 출옥을 해서 보니 나석주가 눈에 띄지 않았다. 수소문을 해보니 이번에는 도리어 나석주가 옥살이 중이었다.
"무슨 일로 석주가 잡혀갔다는 것인가?"
장덕준 교사가 대답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더 이상 국내에서 무슨 일을 하겠느냐면서 압록강을 건너려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그 무렵 김구는 재령군 북률면 무상동 소재 보강학교의 교장도 겸임하고 있었다. 보강학교는 노동자들의 기부금을 모아 1909년 1월에 설립된 노동학교였다. 김구는 매주 하루씩 보강학교에서 근무했다. 김구가 장덕준과 마주앉아 나석주의 행방에 대해 말을 주고받은 곳도 보강학교 교무실이었다.
1920년 동아일보 조사부장으로 재직하던 장덕준은 일제 군대의 만주 한인 참살을 취재하다가 피살된다. 봉오동 전투 패전을 보복하고, 3‧1만세운동 이후 늘어나고 있는 독립군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일제는 간도 일대의 민간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는데, 그 참상을 조사하다가 변을 당한 것이었다.
중국으로 망명한 나석주, 스승 김구를 찾아가다
1910년에는 실패했지만, 1914년에 이르러 나석주는 마침내 북간도로 망명했다. 북간도로 온 나석주는 이동휘가 설립한 동림 무관학교에서 8개월 동안 군사 교육을 받았다. 1916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귀국해 국내에 머물던 1919년에는 3·1운동에 뛰어들었고, 1920년에는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서 결성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친일파 은률 군수 최병혁을 처단하는 거사에 직접 참여했다. 그 후 일제의 체포를 피해 1921년 10월 목선을 타고 중국 천진으로 망명했다.
1924년 10월 나석주는 임시정부 내무총장인 스승 김구의 명에 따라 직접 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나석주는 당시 임시정부 경호국장이었다.
"장덕진 ‧ 윤자영 ‧ 윤기섭 등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20명이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과 독립운동 방책의 쇄신을 도모하자면서 '독립당 대표회의 소집'을 요청한 것도 7월 12일의 일 아닌가? 벌써 석 달이 지났군 그래."
"예, 선생님!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을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김구와 나석주가 모종의 거사를 앞두고 대화 중이었다.
"자네 생각도 그렇지? 장덕진 군 등의 주장이야 건실하고 미래지향적이라는 점에서 백 번 맞는 말이지. 다만 대표회의를 개최하려면 비용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임정에 없다는 것이 현재적 문제 아닌가?"
"그렇습니다. 100인 이상으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나 현저한 활동을 펼친 단체의 대표 1인씩과 임시정부가 지정한 대표들로 회의를 꾸려 '독립운동의 민족적 기초 조직을 공고히 하고 독립운동의 방침을 쇄신 여행勵行하여 독립대업을 촉성'하자는 의원들의 취지는 좋지만, 모든 일이 추진을 하려면 자금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 현실적으로 실현가능성의 문제에 봉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구가 나석주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민정식 알지?"
"예. 명성황후의 친척 되는 그 민정식 말씀이시지요?"
"그렇네. 민정식이 상해의 은행에 거금을 예금해 두었다는 소문이야. 민정식에게 대표회의 개최 자금을 기부하라고 하면 좋을 듯한데……."
나석주가 대뜸 대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임시정부 경호국장 나석주는 손두환, 최천호 등과 함께 활동에 들어갔다. 그들은 민정식을 구금한 후 대표회의 개최 경비를 부담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일이 잘못되느라고 민정식 구금이 소문으로 번져 큰 사건으로 비화했다. 결국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동녕이 대통령 대리직을 사임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이때 나석주도 경호국장에서 물러났고, 10월 25일 손두환이 후임으로 발령났다. 이 사건은 나석주가 김구에게 얼마나 깊은 신임을 받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주는 사례였다.
국내에서 계속된 의열 독립운동의 열기
나석주 ‧ 김창숙 ‧ 류자명이 바다 건너 서울을 폭파하려고 준비에 매달려 있던 1926년 4월 28일, 창덕궁 금호문 앞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 일은 곳곳에서 사람들의 화제가 되었다. 하루는 나석주 ‧ 김창숙 ‧ 류자명도 4월 28일의 거사를 두고 말을 나누었다.
"송학선(宋學善)이라는 34세 청년이 총독 사이토를 처단했다는 소문이 서울에 파다하게 퍼져 있다고 하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고 있다는 소식이오."
김창숙이 그렇게 서두를 꺼내자 류자명이 말을 이었다.
"송 지사의 거사 날짜는 4월 28일이라 하고, 죽은 자는 총독이 아니라 경성부 의원 고산(高山)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총독이 비명횡사했다는 소문이 확산되자 일제도 어쩔 수 없이 사건 경위를 신문에 보도시켰다고 합니다."
"그것 참 아쉬운 일이오! 총독놈을 죽였더라면 참으로 좋았을 텐데!"
김창숙이 한탄을 하자 이번에는 나석주가 말을 이었다.
"고산이라는 자가 총독 사이토와 그렇게 닮았다고 합니다. 총독이 창덕궁 금호문 앞에 출현한다는 풍문을 듣고 송 지사는 칼을 품은 채 기다리다가 자동차가 천천히 움직일 때 벽력같이 달려들어 가슴과 허리를 찔러 상대를 그 자리에서 즉사케 하였는데, 그 자가 사이토가 아니라고 하니 참으로 아쉽습니다."
"아,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오! 그 청년도 의열단 단원인가요?"
김창숙이 묻자 류자명이 대답을 했다.
"그건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금호문 거사는 안중근 의사에 이어 광복회 선배 동지들, 다시 그 뒤를 이어 우리 의열단의 투쟁에 감화를 받은 청년들이 부단히 태어나고 있다는 증좌이니, 송 지사가 의열단 단원이 아닌들 무엇이 대수이겠습니까? 그저 기쁜 일이지요."
"아무렴! 옳은 말씀이오!"
그로부터 두 달 뒤에는 이수흥(李壽興) 지사가 연거푸 의거를 일으켜 사람들의 답답한 가슴에 시원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수흥이라는 22세 청년이 7월 10일 서울 혜화동 동소문 파출소를 습격해서 일본인 순사에게 권총으로 중상을 입혔다 하오."
"혼자서 거사를 하였습니까?"
"그렇다 하오."
"제가 듣기로도 이 지사는 그 뒤 경기도 이천의 백사면 경찰 주재소를 습격했는데, 일본인 주재소장과 조선인 순경이 황급히 도주해버리자 길 건너 면사무소로 가서 권총으로 면서기를 즉사시켰다 합니다."
이번에도 김창숙은 그가 의열단 단원인지 물었다.
"그 청년은 의열단 단원인가요?"
"그것은 알 수가 없고, 임시정부의 만주 참의부 소속이라고 들었습니다."
"의열단의 기상을 이어받아 일제에 맞서는 지사들이 부단히 탄생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오. 모든 조선인들이 마음으로는 한결같이 의열단 단원이 되었소."
"그렇습니다. 이수흥 지사로부터 군자금 조달을 당부받은 류택수(柳澤秀)라는 이도 종로3가 수은동(현재의 묘동) 대로변의 대성호(大成號)라는 전당포에 들어가 주인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했으나 주인이 거절하자 권총을 발사하여 그 자리에서 절명시켰다 합니다."
"왜놈들과 반역자를 처단하고 기관들을 부수어야 독립을 쟁취할 수 있으니 주재소와 면사무소는 응당 습격 대상이지요. 다만 전당포 주인이 단순한 조선인이라면 죽이기까지 한 것은 지나치다 할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저 들은 말일 뿐이니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가 없지만, 그 많은 전당포 중에 왜 하필 대성호인가를 고려해 볼 때 친일 부호가 아닐까 짐작은 됩니다."
이윽고 1926년 12월 24일, 나석주는 인천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이렇게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나석주는 공연히 여러 사람들이 그리워졌다. 의열단에 가입할 때 자신을 신채호 선생에게 안내하기도 했고, 자신보다 두 살 나이가 어려 자연스레 동년배 또는 형제 같은 친근감이 드는 류자명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나석주는 출발에 앞서 류자명에게 거사 추진을 알리는 마지막 편지를 보냈었다.
(전략) 저는 꼭 음래(陰來) 16일(1926년 양력 12월 19일)에 왜선(倭船) 21호 공동환(共同丸)을 타고서 출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휴대 금이라고는 금화 20원뿐입니다. 작탄(炸彈) 3개, 단총 1개입니다. 외형은 천중안(穿中眼)이라 잠간 중국인 행세를 하려 합니다. 불연(不然)하면 발로(發露) 동시에 필야(必也) 최후가 되겠지요. 음력 11월 14일(양력 12월 17일) 나석주
편지 발송 때는 예정일을 12월 19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정이 생겨 닷새가량 늦게 출발했다. 12월 24일, 나석주는 중국 배 이통호(利通號)에 승선했다.
이통호는 이틀 뒤인 26일 인천항에 닿았다. 배에서 내린 179명 중에는 중국인이 172명, 일본인이 4명, 한국인이 3명 있었다. 형사들은 한국인만 끄집어내어 미주알고주알 캐물었는데 저희가 만족하기 전에는 절대 보내주지 않았다.
35세의 산동성 사람 마중덕(馬中德)은 인천부 지나정 38번지의 중국여관 원화잔(元和棧)에 들렀다가 진남포와 평양을 거쳐 27일 서울로 들어왔다. 나석주는 28일 오전에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을 사전 답사하여 투탄 계획을 세운 다음, 오후 2시 5분경 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2시 15분경 동척으로 달려갔다.
중국인으로 위장해 인천 상륙 성공
동척 현관에서 일본인 고목길강(高木吉江)과 동척 직원 무지광(武智光)을 사살한 나석주는 2층으로 가서 토지개량부 기술과장실 차석 대삼태사랑(大森太四郞)을 거꾸러뜨린 뒤 달아나는 과장 능전풍(綾田豊)도 추격하여 쓰러뜨렸다. 이어 폭탄을 개량부 기술과실에 투탄했다. 그러나 불발이었다.
나석주는 동척 사옥으로 들어올 때 밟았던 길을 되돌아나가면서 일본인 두 명을 더 저격했다. 건물을 벗어난 나석주는 권총을 든 채 황금정 거리로 나섰다.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경기도 경찰부 경부보 전전유차(田畑唯次)도 가슴을 쏘아 쓰러뜨렸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순사들이 몰려왔다. 나석주는 황금동 2정 삼성당 건재약국 앞에 이르러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세 번 쏜 뒤, 순사들을 향해 남은 탄환을 발사하면서 그 자리에 혼절했다.
정신을 잃은 나석주는 경기도 경찰부 차량에 실려 총독부 병원 외과 수술실로 옮겨졌다. 나석주는 한참 지난 후 겨우 의식을 되찾았지만 굳게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석주를 보고 일제 경찰이,
"너는 어차피 죽는다. 이름이라도 밝혀두는 것이 좋지 않으냐?" 하였다. 그제야 나석주는 대답을 했다.
"나는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남도리 나석주다."
일경이 다시 물었다.
"의열단원인가?"
"그렇다."
그 후 나석주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내 숨을 거두었다. 1926년 12월 28일 오후 네 시경이었다.
[참고문헌]
국가보훈부 '이달의 독립운동가' 1992년 12월(나석주), 2002년 5월(송학선), 2015년 2월(이수흥),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나석주', 김성민 저서 <나석주>(역사공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