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 뭐하는 사람들이야! 내가 세금내서 월급 받는 인간들이 이런 것도 대답도 못해주고 말이야! 당신들 같은 공무원들 때문에 이놈의 나라가 발전이 없어요!! 발전이..."
대법원 청사 4층을 쩌렁쩌렁 울리는 고성이 들린다. 가지고 온 서류를 냅다 공중에 내던진다. 영화 속 장면처럼 종이가 낱장으로 흩날린다.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가시 같은 독설. 후다닥. 직원 중 한 사람이 청사 보안팀을 호출하는 전화를 건다. 평소에는 고요한 절간 같은 사무실이 호떡집에 불난듯하다. 앞 사무실에서 호기심 많은 누군가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감정노동자의 거친 하루가 시작됨을 알린다.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간다.
법원행정처에 근무할 때 겪는 비일비재한 에피소드 중 하나다. 토지반환 소송과 등기업무 질의를 위해 자주 방문하는 노년의 민원인이 있었다. 무거운 백팩이나 캐리어를 끌고 나타나는 외모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주로 일제 강점기부터 연결된 조상의 땅에 관한 소송과 등기부상 의문점을 해소하고자 찾아왔다. 그가 찾아올 때 상담을 전담하는 사무관은 곤혹스러운 하루가 된다. 한번 앉으면 두 시간은 예사였다.
전국의 각급 법원에 부동산 관련 민사소송만 수십여 건을 제기했다는 민원인. 그가 친일파였던 대지주의 후손이라는 그럴듯한 소문도 있었다. 실제로 상담 목적 구등기부를 살펴보면 개인 명의였다가 국가로 귀속된 토지가 많았다. 여느 법률전문가 못지않게 민사법 관련 전문지식을 많이 알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근거가 부족한 얘기는 꺼낼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정당한 질문과 답변을 거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세금으로 월급 받는 공무원이 감히...
상담 도중 난동(?)을 부려 보안관리대원을 호출할 때도 여러 번. 자신이 묻고자 하는 주제에 알고자 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일단 버럭 화부터 내는 캐릭터여서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했다. 제아무리 친절한 대국민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어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 이들에게 답은 없다. 법원 보안팀은 사법경찰권이 없어서 결국 경찰까지 여러 번 불러야했다. 형법상 공무집행방해죄는 유명무실하게 존재할 뿐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법원의 재판은 악성 민원인이 발생하기 좋은 토양을 가지고 있다
법원은 특히나 악성 민원인이 많이 존재한다. 일반 행정부처의 대민업무는 일부 인허가 업무 외에는 대국민 수혜적 의미의 서비스가 많아 특이 민원이 발생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인허가 업무는 법령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불허사유가 되나 일부 재량이 허용되는 부분에서 신청인의 불만이 발생할 수 있다. 사회복지 업무에서 수혜자들이 불편함을 민원으로 표현하지만, 전형적인 민원제기로 볼 수는 없다.
반면 법원의 재판은 당사자 간의 승패가 분명하고 재판부의 판단이 필요한 다양한 상황이 존재하기 때문에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재판이 나름 정의를 실현하고 옳고 바름을 판단하는 역할도 하겠지만, 당장 패소로 인한 불이익은 한쪽 당사자를 곤혹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민사소송에서 패소하자 자해하겠다고 한 소송당사자도 있었다. 서울00법원 민사법정에서 패소한 피고측 당사자가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뛰어내리려다 실패한 사건이었다. 더구나 법정은 2층이었다. 어찌 보면 웃픈 현실이다. 패소했다는 이유로 해당법원에서 나체시위를 벌인 민원인도 있다.
민사소송은 정의구현이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과는 거리가 멀다. 서로의 이해관계에 있어 누구의 주장이 더 타당한가의 문제로 시작해서 입증절차에서 판사를 설득하면 승소하기 때문이다. 입증책임과 설득은 대부분 원피고 자신과 변호인에게 달려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판사와 법원을 탓하는 것은 재판의 중립성을 훼손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어떤 판사는 패소한 당사자가 법원 앞에서 계속 1인 시위를 하고, 재판부와 실명을 거론하며 민원을 제기해서 정신과 상담을 받을 정도로 스트레스에 시달린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는 공황장애 치료약을 복용하고 뒷머리에 원형탈모까지 생겼다고 한다. 수도권의 모법원에서는 자신이 패소하자 재판부 담당자를 흉기로 위협한 사건도 있었다. 심지어는 이상한 혐의로 판사와 참여관 등을 고소·고발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비송업무도 악성민원의 안심지역은 아니다
쌍방 당사자가 없는 비송업무라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여전히 신청인이 존재하고 그 신청이 업무담당자에게 받아들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비송업무 영역은 등기, 가족관계, 공탁, 회생파산 등이다. 가장 갈등이 없을 것처럼 보이는 등기업무에서도 특이 민원의 싹이 자란다.
특히 법인등기 관련해서는 이해당사자들 간의 갈등양상이 격하게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좋은 마음으로 회사를 설립했다가 무슨 연유인지 분열되고 서로 간에 송사로 이어진다. 주주간의 분쟁은 주로 임원변경등기나 신주발행등기 신청을 통해 첨예화된다.
양측이 주주총회나 이사회를 통해 선임된 이사나 대표이사 변경등기를 번갈아 하다보면 법인등기부가 매일 바뀌기도 한다. 오늘 갑이 대표이사, 내일은 갑을 해임하고 을이 대표이사. 양측은 등기과(소)를 찾아 서로 자기 측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쪽의 등기가 이루어지면 등기관을 고소하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여러모로 불편한 상황이 전개된다.
서울중앙법원 등기국에 근무할 때에는 법인 관련 분쟁사건에서 조폭으로 보이는 일당이 출현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그때는 만만치 않은 공무원들의 거친 저항(?)으로 인해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지만, 등기조사과 내에서는 매일 한두 번의 고성이 오가곤 한다. 법원의 평범한 사무실에서도 자본주의적 욕망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킨다.
부동산 등기의 경우 토지를 둘러싼 분쟁도 점입가경의 경지에 이른 경우가 많다. 등기부에는 가등기와 가처분 등기가 주렁주렁 매달린 케이스가 그렇다. 소유권을 이전해주기로 계약을 해놓고 그 후에 다양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 당사자들은 법원과 변호사들이나 법무사들의 단골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를 들어 갑자기 부동산가격이 폭등하거나 반대로 폭락하는 경우 당사자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계산기를 굴린다. 통상 계약을 하고 마지막 잔금을 치를 때까지 상당한 기간이 소요된다. 이런 경우를 예상해서 해두는 것이 가등기인데, 가등기는 가등기권리자에게 유용한 수단이 된다. 가등기 이후에 현소유자가 처분행위를 했을 때에도 그 법률행위를 부정할 수 있는 강력한 효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등기부상 가등기 이후 본등기 사이에 이루어진 등기는 법률상 효력이 없어 대부분 말소 당한다.
계약의 유무효가 문제되는 소를 제기하거나 등기부상 권리를 부정하는 소가 제기된 경우에는 가처분등기가 마쳐진 사안이 많다. 가처분등기 또한 가등기 못지않게 상대방의 권리처분을 제약하는 강력한 법적 효력을 가진 탓에 그 뒤에 이어지는 등기기록이 말소당하는 수모를 당한다. 문제는 법률적 쟁점과 관계없이 인간의 욕망이라는 전차는 비이성적 궤도를 따르기 마련이어서 늘 비상식적인 분쟁의 소지를 남긴다.
당사자 간 합의나 법률분쟁으로 해결할 사안도 업무처리담당자를 걸고넘어지는 경우도 다반사다. 본인이 원하는 신청을 받아주지 않는 경우에는 각종 고소고발로 협박하고, 공무원의 과실 책임을 묻겠다고 하는 거친 얘기를 들으면 누구나 현타가 온다. 이런 케이스에 잘못 엮이면 철밥통이 아니라 더한 밥그릇이라도 내팽개치고 싶다는 이들도 많다.
회생법원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히 억울한 특이 민원인들
창밖에는 늦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스산했던 날. 회생법원의 2층 파산과. 조용했던 사무실에 어느 여성 실무관의 비명소리가 울러 퍼졌다.
"아~악....."(소리와 함께 느닷없이 의자 엎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선생님. 이게 무슨 경우에요? 말씀도 안하시고...."(직원들이 모여드는 웅성거리는 소리)
깜짝 놀란 연유를 들어보니. 민원인이 소리도 기척도 없이 실무관의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얼마나 놀랐겠는가! 최근에도 뉴스에서 공무원에게 폭력을 휘두른 기사를 접한 터라 놀라 절로 비명이 나왔을 것이다. 이 민원인의 정체는 법인파산 사건의 채권자였다. 그것도 꽤나 오래된 법인파산 사건의 채권자. 아마도 해소하기 어려운 분노가 상당기간 쌓여있지 않았을까.
회생법원의 업무는 기본적으로는 악성 민원인이 발생하기 어려운 분야다. 채무자회생법을 전제로 국가가 채무자에게 일방적으로 제도적 수혜를 주기 때문이다. 비송 업무의 특성상 불만이 크게 없는 게 원칙이지만 늘 예외는 존재한다. 뒤통수를 맞는 채권자나 억울한(?) 채무자들이 종종 등장한다. 때로는 이들 역시 담당 재판부의 판사나 회생위원들과 직원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악역을 담당한다.
회생법원의 파산과에서는 법인회생·파산 사건과 개인파산 및 일반회생 사건을 담당한다. 그러다보니 분노한 채권자들의 본의 아닌 원성을 많이 듣게 된다. 채권자집회에 참석한 채권자들의 거친 항의도 들어줘야 하는 직원들은 샌드백 같은 신세가 된다. 그렇다고 채무자도 아닌 법원 담당자들에게 화풀이하는 것은 부당하면서도 불편하다. 법원 담당자들이 억울한 이들의 가슴을 다독거리고 화를 가라앉히는 것도 한계가 분명하다.
대등한 당사자구조를 전제로 한 재판에서는 승패가 갈라지더라도 서로 싸울 수 있는 무기대등의 원칙상 크게 억울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회생파산절차는 소송이 아닌 비송의 영역으로 국가가 직권으로 채무자에게 우호적인 법률을 기반으로 절차를 진행하다보니 채권자나 이해관계인은 훨씬 억울함이 클 것이다.
법인 회생이나 파산 사건의 경우 채권자가 책 한권에 이를 정도로 많은 경우도 있다. 수많은 회생파산 사건 중에는 채무자인 신청인보다 더 상황이 좋지 않은 채권자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고 판사나 직원들이 억울한 채권자의 하소연을 마냥 들어줄 수도 없다. 업무처리의 객관성과 중립성, 사건처리의 시간적 제약, 채권자들 간의 형평성, 과잉 연민의 경계 등 담당자들이 따져야할 것들이 줄을 서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재판업무든 비송업무든, 사건의 처리결과가 누군가에게 유불리가 있을 때에는 늘 조심하고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공적영역의 업무담당자에게는 일상인 한건의 사건 처리가 억울한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건 중차대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아무런 이유 없이 공공기관에 와서 큰소리치거나 난동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만족할만한 서비스를 받지 못할 때 불편함을 업무담당자에게 표현하는 것이다. 공무원의 업무처리가 위법하거나 부당한 경우의 항의나 분노는 당연하지만, 정당한 거부나 처리결과를 감정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성숙치 못한 행위다.
누군가가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가족, 사회공동체에 관한 관심사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는지 여부를 살펴야한다. 그 전에 무엇보다 먼저 '지금 내 직분에 맞는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부터 살펴볼 일이다. 이는 공무원들도 민원인들도 마찬가지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서울회생법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