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양군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어르신들을 직접 만나 각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노인들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해당 마을의 지난날 변천사부터 다양한 옛 이야기까지 다채로운 주제를 흥미롭게 전달한다. 매월 둘째 주에 보도되는 어르신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지역사회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공유하려 한다.
"바깥양반들 다 세상을 떠나버리고 이제 집집마다 한 사람씩 밖에 안 남았어. 옛날에는 애들도 많았고 북적북적했는데 지금은 비어있는 집이 수두룩해. 자고로 우리 마을은 인심 좋고, 공기 좋고, 사람 좋기로 유명해."
올해 87세 김복련 할머니(석정띠기)는 윗마을 석정마을에서 20대 중반에 시집을 와 70년 가까운 세월을 이곳 휴천면 산두마을에서 보냈다. 지금은 40여명 남짓의 작은 마을이지만 과거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배고프고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가끔은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
그 세월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듯 매 끼니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숟가락이 없어 밥을 얻어먹지 못할까봐 숟가락을 주머니에 챙겨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시집을 오니 먹을 게 하나도 없었어. 들에서 쑥을 따다가 보리쌀 쪼께 넣고 삶아서 먹고 그랬지. 이것도 엄써가꼬 못 묵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그렇다고 처녀 때는 끼니나 잘 때웠나? 한 날은 군인들이 빨갱이 잡는다꼬 집을 찾아와서 쑥대밭을 만들고 마을 사람들 전부 내쫓았어. 그때는 뭔지도 모르고 눈 감고 앞 사람 등에 손 올리고 따라갔지. 그러고는 해가 떨어지니까 가라고 하더라고 근데 우리 마을(석정)에는 못 가게 했어. 그래서 너무(다른) 동네서 2년 동안 살았지. 그때 빨갱이로 몰려서 죽은 사람들이 정말 많아/"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살림에 국군들이 자행한 양민학살까지 덮치며 가세는 점점 기울었다.
"한 2년을 이름도 모르는 마을에서 방을 얻어 갖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지.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그때 생각하면 말도 못하게 어려웠어."
옛 어르신들의 결혼은 대부분 부모들이 결정하는 중매혼으로 진행됐다. 김복련 할머니가 20대 중반 어느 날 일면식도 없었던 배우자를 맞이했다.
"스물 중반에 석정에서 시집을 왔어. 옛날에는 어른들이 결혼 하라카면 그냥 하는 거였어. 어르신들이 얼마나 엄했냐면 어떤 날에는 밖에서 친구들하고 놀고 들어오니까 어머니가 문을 걸어 잠그고 안 열어줬어. 다 큰 여자가 밖으로 나다닌다고. 그 이후로 마음에 드는 남정네가 있어도 혼자 마음으로만 품었지."
김복련 할머니가 웃어 보였다. 석정마을에서 시집을 온 김 할머니는 슬하에 4명의 자식을 뒀다. 자식들 먹여 살리기 위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은 김 할머니는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바깥양반은 부잣집에 일을 해주면서 1년에 한 번씩 집에 오고, 나는 남아있는 자식새끼들 뭐라도 맥여야 한께 너머(남의) 집 논에 모심어주고 양석(양식) 조금 받고 지냈지 뭐. 그래도 먹을 게 없어서 보리쌀을 호박돌(돌 가운데 구멍을 만들어 곡식을 가루로 만드는 돌)에 넣고 가루를 맹그러서(만들어) 먹었어.
양이 많아지니까. 그라고 어떤 날은 면사무소에서 밀기울(밀의 속껍질이 많이 섞인 것으로 기호성이 높고 소화가 잘 되어 지금은 가축의 사료로 많이 쓰인다.)이 배급이 나오면 얼마나 거친지 몰라. 집에서 만들어 먹으면 보드랍고(부드럽고) 그런데 배급으로 받은 밀기울은 거칠어. 이리 받은 밀기울을 쑥이랑 섞어가 쪄서 개떡 메이로(처럼) 만들어서 묵었지 어린새끼들 젖 물릴라믄(물리려면) 먹어야 하니까."
지금이야 인건비가 만 원에 육박하지만 당시만 해도 하루 일당이 많으면 2천원이다. 이도 값을 제대로 받아 수완이 좋은 것이고 나머지는 소금, 된장 한 그릇 정도 받는 것이 대다수다.
"조금 잘 사는 집을 찾아가서 여름날 하루 점두로(종일) 땡볕에서 일하고 된장하고 소금 조금 받고 일했지. 이렇게 받아도 아이들 키우는 데 턱 없이 부족해서 도지쌀(쌀을 대출하는 격으로 쌀 한가마니를 빌리면 다음 수확일 때 한가마니 반으로 갚는 것)을 내서 먹고 또 갚고 그렇게 지내니까 계속 갚아야할 쌀이 늘어. 그게 싫으면 '고지모'라고 부잣집 쌀을 갖다 먹고, 나중에 그 집에 모를 서마지기에서 너마지기 숭굴(심을) 때 도와준다고 계약했지."
당장에 먹을 것 하나 없던 시절 제대로 된 의료시설도 만무하다. 자신이 가진 병명도 모른 채 지냈던 사람들은 몸에 이상이 있으면 임시방편으로 민간요법처럼 전해내려 오는 약초를 따서 먹기도 했다.
황정자( 81·산동띠기) 할머니가 말했다.
"밥도 밥인 데 병에 걸려서 죽는 사람도 많았어. 그때는 암에 걸려도 암인지도 몰라. 배가 아프면 산에 나는 풀 몇 개 꺾어서 먹어보고 괜찮아지면 그게 약이라고 생각했어. 그러고 아이들은 홍진(홍역)하고 장티푸스 때문에 진짜 많이 죽었어. 그래서 애를 낳으면 1~2년 있다가 출생신고를 했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석정띠기 김복련 할머니는 휴천면 산두마을에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인근 화장산에서 신라시대 화랑들이 수련하고 지금의 경로당 앞 냇물에서 멱을 감았다고 한다.
"여기 뒤로 보이는 화장산을 보면 반은 휴천이고 반은 유림면이야 옛날에 신라 화랑들이 저거 화장산에서 훈련을 하고 내려와서 이곳 산두마을에서 멱감았다는 소리를 들었지. 지금은 광장이 굉장히 넓지만 예전에는 이 앞으로 냇물이 흘렀어. 그런데 병자년 수파(수해) 때 물길이 바뀌면서 지금은 위쪽으로 물이 흐르고 있지."
사랑방 수다
산동띠기(81)가 말했다.
"내는 입이 짧아서 보리밥이랑 무시(무) 섞어가꼬 주면 묵도 몬 해. 그기 묵기가 싫으가꼬 참다가 결국에는 배가고픈께 억지로 묵는기라. 나는 요즘 같은 세상이 올줄 꿈에도 몰랐어."
금반띠기(72)도 말을 보탰다.
"우리 남편은 월남전에 참전 했었어. 그때 고엽제 맞아서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나버렸지. 한 달만 있으믄 보상금이 나오는데. 그걸 못 기다리고 떠났지. 그때 초상비로 13만원 나오더라고 지금 생각하면 남편 먼저 떠나 보낸 게 가슴이 너무 아파."
한남띠기(78)는 "옛날에는 연애 했다쿠면 집안 망신이라 집안 망신. 절대로 그런 것은 못했어. 다 부모님들이 결정해서 가는 것이지. 어떤 사람은 결혼식 날 남편을 보니까 기구한 사람도 오고 그랬어"라고 했다.
산두띠기(81)는 "한참을 못 묵고 지내다가 새마을 운동 하고 나서 조금 살만해졌지 그때부터 밀가리(밀가루)도 나오고 그래갖고 쑥 뜯어다가 밀가리랑 버무려서 묵었지. 어찌보면 쑥이 진짜 보약인 것 같아. 동네 사람들 죄다 쑥 뜯어먹고 살았으니께"라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함양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