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우연히 TV를 보다 화면 아래 작은 글씨로 짧게 지나가는 대형 기획사의 드라마 공모전 공고를 봤다. 작은 글씨였지만 내게 그 글씨는 너무나 또렷이 보였고, 갑자기 심하게 요동치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게 얼마 만에 느끼는 설레임인가. 연애의 감정에서는 느끼는 설레임 두근거림과는 분명히 다르다.
기분 좋은 떨림, 긴장감, 도전하고픈 욕망, 나도 모르게 불끈 주먹 쥐는 나를 발견하고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가슴에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누구의 엄마도 누구의 아내도 아닌 내가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고자 했다. 이제 다시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그런 나를 그리고자 한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이 책은 미국의 '모지스 할머니'로 불리는 76세의 할머님이 쓰신 책이다. 그녀는 화가이자 작가이다. 책을 통해 본 그녀의 그림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감에 섬세함이 돋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한번도 그림을 배운 적이 없다고 한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떠오른 그림이 있었다. 어릴 적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의 무릎 배게에 누워 있으면 풍겨지는 할머니의 비누냄새에 그대로 스르르 잠이 올 것 같은, 그런 따뜻하고 편안함이 느껴졌다. 술술 읽혀지는 그녀의 글은 따뜻한 햇볕이 내려앉은 거실에서 모든 세상근심 잠시 다 내려놓고 오롯이 쉴 수 있는 안락의자 같았다.
내가 그녀에게 놀란 것은 그녀의 나이였다. 어느 수집가의 눈에 띄어 알려지게 됐지만, 76세의 나이에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는 것이 나를 자극 시켰고, 젊은 날 가졌던 나이에 대한 안일한 나의 생각을 깊이 반성하게 했다.
"사람들은 내게 이미 늦었다고 말하곤 했어요. 하지만 지금이 가장 고마워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꿈꾸는 사람에겐 바로 지금 이순간이 가장 젊은 때이거든요. 시작하기에 딱 좋은 때 말이에요."
-모지스 할머니 이야기, 책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p.256
드라마작가라는 꿈을 다시 꾸다
나는 세상의 중심에 서고 싶었다. 반백살에 말이다. 꿈을 찾아 드라마작가가 되고자,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에 다녔던 때가 떠올랐다. 친한 동기들과 작가교육원 옥상에 올라가 해지는 노을을 보며 꿈을 설계했다. 설령 그 꿈이 실현되지 못할지언정 지금 한번 불태워보지 않으면 먼 미래에 후회할지 모른다는 절실함도 있었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여의도 옥상에서 200원짜리 찐한 프림이 들어간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서도 꿈꾸는 미래가 있었기에 정말 행복했다.
모지스할머니도 지금의 나와 같은 느낌이지 아닐었을까 싶다. 76세가 되던 해, 관절염이 심해 실을 자수에 끼울 수가 없었지만, 그녀는 바늘 대신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공모전에 내가 쓴 대본을 제출하면서도 그래도 느꼈던 일반적인 고정관념, 심사위원들이 대본을 보기도 전에, 내 나이를 보며 혹여 가졌을 야유, 편견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나의 노파심이 모지스 책을 보며 가볍게 또 부드럽게 정화됐다. 오히려 그녀의 나이가 가진 삶의 무게에 경애심과 존경을 표한다. 잠시나마 가졌던 나이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다시금 반성했다.
"물론 나에게도 시련이 있긴 했지만 그저 훌훌 털어버렸지요. 나는 시련을 잊는 법을 터득했고, 결국 다 잘될거라는 믿음을 기지려 노력했습니다." (p.135)
우리가 잘아는 배우 윤여정. 그녀는 70살에 외려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재작년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탔고, 그녀의 수상소감에 나는 다시 한번 경애심을 표했다. 퍽퍽했을 그녀의 삶. 이혼 후, 그녀가 책임져야할 두 자녀와 함께 먼 타국에서 살아가며 지녀야했을 무거운 책임감. 그녀의 삶은 분명 힘들고 고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누구보다 멋지다.
"저를 일하게 만든 두 아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네요. 사랑하는 아들들아, 이게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란다." - 윤여정, 오스카 수상소감 일부
결국 삶은 스스로 만드는 것
젊은 날의 내게 임신과 출산은 생애 가장 큰 축복이었고 행복이었으며, 내 아이는 내가 낳은 최고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 시기 결혼은 고달팠고, 독박육아로 매일 온몸을 두들겨 맞는 것처럼 아팠으며, 마음은 곪을 대로 곪아가고 있었다. 작가의 꿈은 당연히 내려놓아야 했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들어갈 때 나는 다시 교사 일을 시작했다. 생계를 위해 시작했지만, 일하며 느끼는 보람과 배움은 나를 다시 찾게 됐다. 여전히 힘들고 지치는 삶이지만 나는 길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으며 그 길 어딘가에 종착역이 있을 거라 믿는다. 방황하던 이십대, 꿈을 찾았던 삼십대, 결혼과 육아를 보내던 사십대를 지나면서 나는 내 인생을 돌아볼 줄 아는 마음과 살필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이다.
스쳐가던 짧은 공고를 보고 절망하며 내려놓았던 그 꿈을 가슴 뛰는 설레임을 다시 느꼈다. 내 나이 반백살에 말이다. 삼십대 후반에도 늦은 나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나이 반백살에 다시 꿈을 찾아보겠다고 마음을 먹는, 언뜻 모순된 일을 벌인 것이다.
삼십대에 왜 좀더 용기를 가지고 하지 못했나 후회도 되고, 자학도 든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글에 진득함이 있으려면 삶에 서사가 필요하듯이 내가 쓰고 싶어 하는 감동과 울림을 주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항상 가장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르다.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꿈꾸는 사랑에겐 바로 지금 이순간이 가장 젊은 때라는. 시작하기에 딱 좋은 때라는 모지의 할머니의 이야기가 참 가슴에 와닿는 순간이다. 오늘이 제일 좋은 청춘이다.
내 딸이 소중한 만큼 내 새끼들, 내가 긴 시간 공들여 쓴 내 작품들이 밖에 나가서 잘 놀기를 바란다. 집안에서 그동안 답답했을 내 작품들이 이제는 밖에서 마음껏 놀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다. 심장이 다시 뛰는 두근거림, 밤새 글을 써서 몸은 피곤하지만 아침 해를 맞는 그 상쾌함을 느끼며 반백살에 다시 공모전에 도전했다.
이제 나에게 그동안 열심히 잘 살아왔다고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해줄 수 있는 여유도 지니게 됐다. 혹 지금 무언가 도전하고 싶은데 나이 때문에 망설이는 분들이 있다면, 그동안 열심히 잘살아오셨다는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못다 이룬 꿈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한번 도전해보라는 말을 건네주고 싶다.
저 같은 못난 사람도 도전하는데 무얼 망설이시나요. 어떤 일이든 도전해보세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이는 없습니다. 모지스 할머니가 자신을 사랑했듯, 윤여정 선생님이 자신을 사랑했듯, 사랑하는 나를 위해 더 늦기 전에 도전해보세요. 오늘이 가장 젊은 날입니다.
"삶이 내게 준 것들로 나는 최고의 삶을 만들었어요. 결국 삶이란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언제나 그래왔고, 또 언제까지나 그럴 겁니다." - 모지스 할머니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개인 블로그 'https://blog.naver.com/chaos2023'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