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명을 죽인 살인자들에게 고작 금고 4년이 뭡니까!"
가습기 살균제로 아내를 잃은 김태종씨가 소리쳤다. 피해자 민수연씨는 "이제야 사법부의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저는 말씀드리려고 했지만, 반쪽짜리 실현"이라고 말했다.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던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 기업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와 하청업체 관계자 13명이 11일 항소심에서 모두 유죄를 선고받았다. 피해자들은 1심 판결이 뒤집힌 데에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더 엄중한 책임을 묻지 못한 사법부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서승렬·안승훈·최문수 부장판사)는 이날 업무상 과실치사 등의 혐의를 받는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 한순종 전 상무,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에게 금고 4년을 선고했다. 그외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 임직원들에게는 금고 2년 6개월~금고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하청업체 대표와 공장장에게는 금고 2년~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① 이들 기업이 제조·판매한 CMIT·MIT 성분을 주원료로 하는 가습기 살균제 단독으로 또는 ② 이들 제품과 옥시 제품 등 다른 성분(PHMG 또는 PGH)으로 만든 가습기 살균제를 함께 사용한 사람 98명을 죽게 하거나 광범위한 폐손상·천식에 이르게 했다는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지원 종합포털에 따르면, 현재까지 피해 신고자는 모두 7891명이고, 이 가운데 사망자는 1843명에 달한다.
1심 '무죄' → 2심 '유죄'
지난 2021년 1월 서울중앙지방법원 1심 재판부는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와 하청업체 관계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앞서 대법원에서 징역 6년이 확정된 신현우 옥시 전 대표 사례와 대비됐다.
당시 무죄의 이유는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의 가습기 살균제 주원료인 CMIT·MIT 성분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유발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증거가 부족하다는 거였다. 1심은 특히 쥐를 이용한 독성시험 결과 CMIT·MIT 성분은 독성이 확인된 PHMG 등의 성분(옥시 제품)과 유사한 실험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1심 판단을 뒤집었다.
"원심(1심)의 판단은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여러 수단 중 하나인 동물실험 결과의 간접적·보충적 성격을 오해하여 그 실험 결과를 해석함에 있어 해당 실험을 수행하거나 검토한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과학적 의미를 간과하고, 실험실 환경과 실제 사용환경 간의 차이, 실험대상이었던 쥐와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종간 차이 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위 각 실험의 계량적 평가수치에만 지나치게 높은 비중을 둔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특히 2017년부터 발표된 여러 역학 연구결과들에서, CMIT·MIT 성분 가습기살균제 사용 전후로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입원발생의 격차가 관찰됐다"면서 "가습기살균제 노출 기간에서 비노출 기간보다 폐렴, 간질성 폐질환, 천식 등 호흡기계 질병의 발생률이 2배 이상 높게 나타났다"라고 밝혔다.
이어 "따라서 이 사건 폐질환·천식과 CMIT·MIT 성분 가습기살균제 사용 사이에 역학적 상관관계가 존재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는데, 이러한 역학연구결과도 이 사건 일반적 인과관계를 뒷받침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또한 "가습기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평소 건강이 좋지 않거나 건강상 피해를 염려하는 임산부, 영아, 입원환자, 노약자 등이고 이들에게는 소량의 유독한 화학물질에도 건강한 성인에게는 예상하기 어려운 심각한 건강상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 사건 각 가습기살균제 제품의 전체 판매량 대비 피해 사례가 소수라거나, 같은 환경에 노출된 다수의 사람들 또는 가족들에게서 건강상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일반적 인과관계가 부정된다고 볼 수도 없다"라고 밝혔다.
재판부 "전 국민을 상대로 독성 시험한 사건"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양형을 판단하면서 이 사건의 엄중함을 환기시켰다.
재판부는 "이 사건은 제품 출시 전 동물들을 상대로 한 안전성 검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연령대의 불특정 다수의 국민에게 이 사건 각 가습기살균제 제품이 유통됨으로써 사실상 장기간에 걸쳐 여러 다양한 환경에서 전 국민을 상대로 이 사건 각 가습기 살균제의 만성 흡입독성 시험이 행하여진 사건으로도 볼 수 있다"라고 판단했다.
이어 "피고인들의 이러한 과실이 다른 공동정범의 업무상과실과 중첩적 또는 순차적으로 경합한 결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폐질환 또는 천식으로 큰 고통을 겪었고, 상당수의 피해자들은 사망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참혹한 피해를 입는 등 그 존엄성을 침해당했다"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재판과정에서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은 피해자들이 입은 신체적 피해뿐만 아니라 그동안 겪었던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거듭 호소하며 피고인들에 대한 엄벌을 호소하고 있다"면서 "각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의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많은 국가적·사회적 비용이 소요되었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피해의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다만 재판부는 피고인들에게 유리한 양형 사유로 "피해자들 중 이 사건 각 가습기살균제의 단독사용자는 4명인 반면, 복합사용자는 94명에 이르고, 복합사용자들의 경우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PHMG 또는 PGH 가습기살균제를 주로 사용한 사실이 인정된다"라고 설명했다.
피해자들 "가해기업은 국민을 마루타로 생각... 국가는 뭐했나"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선고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유죄 선고는 다행이지만 선고된 형량이 검찰 구형량(금고 5년)에 못 미쳐 아쉽다는 입장을 밝혔다. 어떤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눈물을 흘렸고, 법원을 빠져나가는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에게 항의하거나 소리친 이들도 있었다.
피해자 조순미씨는 "피해자들은 길게는 20년, 또 짧게는 수년 동안을 아픈 몸으로 투병해왔다. 저도 올해로 15년째 투병했다"면서 "오늘 실형이 나와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검사 구형보다는 못한 실형이 나왔지만 그래도 (공소사실을) 다 인정하는 재판부 입장을 보여줘서 마음이 한결 놓인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다면 가해기업이 이 수십 년 동안 우리 국민을 마루타로 생각하듯 그 화학물질로 온갖 피해를 줬다고 한다면, 과연 국가는 이 국민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면서 "이제부터는 저희는 정부의 책임을 묻고 가해기업에 제대로 된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과 배상과 해결방법에 대해서 대책을 세우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마지막으로 피해자와 시민사회단체 명의의 성명을 낭독했다.
"이제 이 사건은 대법원이 2심 판결을 확정하는 절차만 남았다. 신속하게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이제부터 피해자들에 대한 배보상이 제대로 진행되어야 한다. 또한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한 축인 정부 책임도 물어져야 한다. 진상규명 피해 대책과 함께 제대로 된 재발 방지 조치도 시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