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필리핀, 나는 봉사를 하러 와 있다. 그런데 며칠 전 멀리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서 갑자기 카톡이 왔다. '막걸리에 두부김치로 혼술 한다고, 할머니가 다 돼버렸다'고...
혼자 마시는 혼술을 하니까 할머니인가? 아니다, 누구든 외롭고 쓸쓸하니까 혼술을 한다. 한겨울의 포장마차에서, 아파트 베란다에서, 혼술은 혼자 견디는 힘이다. 한겨울의 추위를, 노년의 쓸쓸함을 말이다. 카톡 글자에서 묻어나는 아내의 물먹은 목소리가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아이들은 독립, 남편은 봉사... 홀로 외로울 아내를 상상하니
아이들은 모두 출가하여 제각각 살기에 바쁘고, 남편은 봉사한다고 멀리 필리핀에 나와 있으니, 홀로 견뎌내는 나날들이 얼마나 외롭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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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바늘과 실처럼 붙어살다가 떨어지니, 한쪽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쓸쓸함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으리라. 활동적인 성격이 아니라 특별히 가까이하는 친구도 몇 없는 아내. 홀로 조도를 낮춘 거실에서 혼술하는 아내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마치 인디언 인형처럼 외로움에 검게 타 시들어 버릴 것만 같다.
내가 이곳에 봉사를 하러 나올 때에도 아내는 몇 번이고 만류를 했었다. 너무 위험한 곳이라고, 나이 들어서 웬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국내에도 봉사할 곳이 많다고, 그동안 직장 생활하느라 고생했으니 이제 편하게 살자는 것이다. 나이 들어 떨어져 살기 싫다는 걸 내가 뿌리치고 왔는데, 이곳에 와서도 그런 투정의 전화를 몇 번 더 받았다.
사실 퇴직 전에는 주말부부 생활도 꽤 오래 했었는데 이렇게 힘들어한 적은 없었다. 아내가 외로움에 취약한 나이인가, 그럴 나이는 지난 것 같은데. 혼자 건너는 세월의 강이 나이에 짓눌려 버거운가 보다. 혹여 마음을 다쳐 우울해 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헤어지면 그립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몹쓸 것 이 내 심사'가 딱 우리네 마음이다.
힘든 시기도 함께, 아련한 추억
아내도 집에서 마냥 놀기에는 이른 나이라 지금도 직장생활을 한다. 주말에는 성당에서 성가대 합창단으로 활동하며 나름 바쁘게 살아가는데, 종종 남편의 빈자리가 한겨울의 삭풍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남들은 떨어져 살지 못해 안달이라는데 우리 부부는 유별나게 같이 있기를 원한다. 여행이든 모임이든 어디를 가더라도 같이 가야 마음이 편하고 안심이 된다. 하지만, 퇴직하고 1년을 집에서 쉬었더니 그때는 내가 무료하고 불편해서 견디기 힘들었다. 바쁘게 일을 하면서는 느끼지 못했던 그런 감정이 나를 이곳까지 오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내와 나는 갑돌이와 갑순이처럼 한 마을에서 오빠, 동생으로 만났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도회에서의 부침의 생활을 접고 우리 가족이 고향마을로 돌아갔을 때는 내가 까까머리 중학생이 될 무렵이었다. 바닷가 고향마을은 사춘기로 접어드는 내게 꿈과 낭만을 가져다줬다. 그곳에 아내도 있었다. 아름다운 소녀의 말간 눈빛이 내 영혼의 거울이 되었다.
푸른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 사이로 조금씩 움직이는 함선과, 바닷가 바위에 쉬임없이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 모래톱에 무수히 써내려 간 우리들의 추억, 조개껍질, 조약돌, 모래알…, 그 시절의 모든 풍경과 사물들이 내 인성의 밑그림이 되었고, 나중에는 내 꿈속의 배경이 되었다. 그것들과 함께 아내는 내 마음속에서 사랑으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도회로 나가 상급학교에 다니고 직장생활을 했다. 나는 군대 제대 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낙향을 선택했다. 나는 전쟁 통의 참호 속에서 맨몸으로 뛰쳐나온 병사처럼 갈팡질팡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아내가 내 앞에 나타났다. 명절에 잠깐 고향 집에 들렀던 것이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자라던 아내에 대한 사랑이 나를 깊은 수렁에서 깨웠다.
아직 못다 한 사랑을 죽는 날까지
우리는 그렇게 만나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다. 두 아이를 낳고 지금까지 살았다. 시골에서 도회로 이사를 거듭하며,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살아왔다. 어린 날의 그 아름답던 추억은 어디에 묻혀 있는지, 내 소중했던 꿈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 많은 세월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는 사이 아내와 나는 벌써 환갑을 넘은 나이가 되었다.
정신연령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은 아직도 청춘인데, 손자와 손녀를 봤으니 물리적으로는 엄연한 할머니, 할아버지다. 세월은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이제 60줄도 금방 꺾일 것임을 알기에 건강하고 총총할 때 더 사랑하고, 더 아끼고, 서로를 위하면서 살아가자는 것이 아내의 바람일 것이다. 나도 거기에 백번 동의한다.
요즈음 여유 있는 노인들은 바닷가나 산속의 경치 좋은 실버타운에서 보낸다는데, 나는 그러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고여있는 듯 살고 싶지는 않다. 한국에 들어가면 건강이 허락하는 한 아내와 함께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여생을 즐기다가 어느 날 낙엽처럼 조용히 흙으로 돌아가고 싶다.
아내의 카톡에 답장을 보낸다.
'너무 외로워하지 말고 허망해하지 맙시다. 인생은 60부터랍니다. 우리가 외롭고 쓸쓸하고 보고 싶다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못다 한 사랑이 남아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많이 사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