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터치’ 올해 <용인시민신문>의 핵심 편집 방향 중 하나입니다. 어느덧 110만 수도권 중핵도시로 자리잡은 용인특례시의 미래는 결국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 달려 있습니다. 깊고 건강한 뿌리가 푸른 잎과 너른 가지로 뻗어 나가듯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한 도시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다양한 생활 영역에서 제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진솔한 이야기로 만나 봅니다.
[기자말] |
지난 2023년 11월 시청 컨벤션홀에서 열린 제27회 한국자유총연맹 용인시지회 자유수호자 전진대회를 겸해 박창무(63) 신임 회장이 취임했다.
여러 식순 가운데 특히 박 회장은 이 자리에서 6.25 참전용사인 아버지를 직접 소개했다. 그의 아버지 박병화(90) 선생은 6.25 전쟁 참전용사로 가슴엔 휘장이 자랑스럽게 달려 있었다.
"여러 봉사단체 사회단체 공공기관 등 책임자 역할을 두루 해 봤어요. 다 보람 있는 역할이었죠. 이번 일은 다른 무게로 다가와요. 그간 대부분 사업 외에 다양한 봉사활동에 대해 반기질 않으셨는데, 이번엔 말씀은 안 하셨지만 그 표정에서 흡족함이 느껴졌어요.
뭘까 생각해 봤어요. 비극의 한 가운데 계셨던 아버지로선 저의 선택이 참전 용사로서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계승한다고 보신 것 같아요. 그 어느 때보다 자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박창무 회장은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아왔다. 주로 봉사하는 영역이다.
사업을 하면서 용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총동문회 제8, 9대 회장, 용인라이온스클럽 제51대 회장, 중앙동 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아왔다.
뭔 단체장을 그리 많이 거쳤느냐는 물음에 그는 예의 차분한 어조로 그러나 단호히 이렇게 말했다.
"봉사단체, 사회단체, 공공기관 등 책임자 역할을 두루 한 것은 맞지요. 그런데 솔직히 말할게요. 제가 사업하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사익을 위해 맡는 적은 없어요. 실제 누구 도움으로 건설 공사를 따거나 한 적도 없어요."
지역사회 여러 영역에서 리더 활동을 한다는 것은 때론 괜한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꾸준히 영역을 넘나들며 봉사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오지랖? 아니오. 그저 쓰임새가 있으면 피하지 못하는 약한 마음 아닐까요?" 그를 통해 비슷한 길을 걷는 이들의 마음까지 헤아려본다.
- 자유총연맹, 어떤 곳인가?
"아직도 반공연맹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념단체 느낌도 없지 않다. 자세히는 모르나 1950년대 아시아민족반공연맹으로 출범했다고 알고 있다. 전쟁 중에는 반공 단체로 활약해 왔던 게 맞다. 하지만 남·북 화해 무드가 조성된 지난 1990년대 이후로는 안보를 중시하는 단체를 기치로 활동해왔다. 물론 대한민국 자유 민주주의의 옹호하는 바탕 위에 서 있다. 기본적으로 NGO라고 봐야 한다."
- 용인에서 걸어온 길은?
"1969년 한국반공연맹 용인군지부 결성이 모태다. 1989년 '한국자유총연맹 육성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면서 한국반공연맹의 모든 권리·의무를 포괄 승계한 한국자유총연맹이 같은 해 4월 창립됐다. 1996년 3월 1일 용인군이 용인시로 승격됨에 따라 한국자유총연맹 용인시지회로 명칭이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어떤 활동을 주로 하나?
"자유민주주의 신장 활동의 일환으로 자유 수호 지도자 전진대회 개최, 자유수호 희생자 합동위령제, 자유수호 희생자 위령탑 관리, 청소년 평화통일 교육, 용인시민 안보의식 결의대회, 북한이탈주민 및 용인시민 화합의 한마당, 시민 안보강연회, 북한이탈주민 도우미 등 활동을 하고 있다."
- 탈북민 지원활동이 새로 부각되는 사업으로 보이던데.
"지난해 11월 말 '좋은사람들'(회장 김도준)과 함께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에 있는 우리집 시설을 이용해 탈북민 정착 지원을 위한 김장김치 지원 행사를 가진 바 있다.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감보단 이질감과 적대감이 더욱 커지는 마당에 그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적응하도록 돕는 일은 먼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용인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