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삼한사온의 전통적인 겨울 날씨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지구온난화나 엘리뇨 등의 영향으로 인한 겨울철 이상 고온과 여름철 이상 한파 등이 빈발하다는 소식도 있다. 이상한 기후 현상은 더 이상 생경한 단어가 아니다. 이쯤 되면 겨울에 눈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올 겨울은 서울에서도 눈이 제법 흩날린다. 남부와 동부 지방에서의 폭설로 인한 사건 사고도 뉴스를 통해 들었지만 내가 사는 경기 부천 지역에서는 아직은 그렇게까지 큰 눈은 없었다. 사고를 떠올리면 걱정스럽지만, 온통 흰 눈에 덮인 풍경이 주는 아름다움은 동화의 세계처럼 환상적이어서 현실의 여러 문제를 잊을 만큼 눈이 멀게 한다.
며칠 전 밴드에서 1주년 기념 앨범이 도착했다는 알람이 왔다. 밴드에 저장된 사진이 때때로 편집된 영상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잔잔한 재미다. 바로 지난겨울 덕유산에 올라 찍은 사진이었다. 온통 눈으로 덮인 정상과 탁 트인 시야, 맑은 하늘 아래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빼어난 자연은 손기술이 없이도 엄청난 화보를 만들어 낸다는 생각을 했다.
올해도 가볼까 싶어 하루 코스의 눈꽃 여행지를 검색하다 강원 평창 발왕산이 눈에 들어왔다. 발왕산은 해발 1458m로 대한민국에서 12번째 높은 산이라고 한다. 발왕산이라는 명칭은 옛날 도승이 이 산에 팔왕(八王)의 묏자리가 있다고 하여 팔왕산이라 불리다가 일제강점기 이후 발행된 지형도에는 발왕산(發旺山)으로 기재됐고 2002년도 다시 발왕산(發王山)으로 변경됐다고 한다.
또한 산악인의 이름을 딴 등산로(엄홍길 코스)로도 유명하다. 시작과 탄생, 성공과 챔피언의 산이자 왕이 태어나는 어머니 산이라고 리플릿에는 소개돼 있었다.
정상에 도착하자... 상상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우리는 늘 다니던 대로 계획 없이 집을 나섰다. 아침에 출발해서 고속도로를 타고 3시간 만에 도착한 평창군 대관령, 발왕산은 용평 스키장을 품고 있다.
발왕산 정상은 관광케이블카를 이용해서 편하게 오를 수 있다. 온라인으로 발권하면 케이블카 이용료 20퍼센트를 할인받을 수 있다. 미리 예약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당일에 예약하고 바로 사용할 수도 있다고 하니 온라인 예약을 권한다.
지난해에 갔던 전북 무주 덕유산 케이블카는 오래 줄을 서서 기다린 후에 떠밀리듯 탑승했고 내려올 때는 한 시간 넘게 줄을 서서 겨우 탈 수 있었는데, 이곳은 올라가는 것도 여유롭고 내려오는 것은 더 여유롭다.
7.4km, 편도 18분의 탑승 시간 동안 눈꽃을 피운 나뭇가지들 사이로 구불구불한 슬로프를 타고 내려오는 스키어들을 볼 수 있다. 슬로프도 완만하고 안전해 보인다. 북적거리지 않아 즐기는 맛이 있을 것 같았다.
정상에 도착하면 아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풍경이 펼쳐진다. 신비롭고 웅장하며 인간 세상의 아름다움을 초월한 듯한 풍경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러 사람의 입에서 탄성이 터진다. 눈으로 담기에 벅찬 풍경이다.
먼저 스카이워크는 발왕산의 명물이다. 우리가 간 날은 매섭게 바람이 몰아치는 데다 바닥은 눈과 얼음이 쌓인 빙판에 눈발도 흩날렸다. 아쉽게도 출입금지 팻말이 걸려있었다. 시야는 온통 흐렸다. 집에서 본 영상을 바탕으로 가늠해 보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날 좋을 때 다시 가볼 것을 기약했다.
진짜는 지금부터다. 탑승장을 벗어나면 사진을 찍는 포인트가 곳곳에 잘 꾸며져 있다. 일행끼리 찍을 수 있도록 서로 카메라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중, 3시간을 걸어서 올라왔다는 등산객이 있다. 쉽게 도전하기는 어려운 길이었을 텐데 올라올 때 괜찮았을지 잠깐 궁금했다. 산악인의 포스가 진하게 풍기니 가능할 수 있었겠다고 혼자서만 생각했다.
누군가는 3시간 즐겼는데 나는 고작 20분의 눈호강? 그럴 순 없다. 이곳에서라도 알차게 채워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진다.
모나 파크에서 발왕산 평화봉 정상, 천년주목숲길로 이어지는 길은 영화에서 보았던 그 어떤 풍경보다 뛰어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미 사람들은 설경에 푹 빠져들었다. 모든 나무들이 눈으로 옷을 입었고 상고대의 진수를 보여준다. 넉넉히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고 마음도 흡족해진다.
발왕산 가면 천년주목숲길 꼭 돌아보길
발왕산 정상의 천년주목숲길도 천천히 돌아볼 것을 권한다. 데크길을 걷는 동안 자동으로 숲길을 안내하는 음성이 나온다. 하나의 몸통에 두 나무가 함께 자란다는 마유목과 속이 텅 빈 참선주목, 뿌리를 뻗은 모양이 왕발처럼 생겼다는 왕발주목 등 상세한 설명이 이어진다.
사실 온통 눈에 덮여 있어서 설명대로의 나무의 특징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이미 충분히 아름답고, 담긴 의미만큼 벅찬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분명하다.
눈을 쉽게 볼 수 있는 계절이라지만 눈이 연출하는 진수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1년에 딱 한 번,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아니라 천천히 눈에 가득 채우기에 딱 적합한 곳으로 추천한다.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이곳만의 특별한 눈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느긋한 마음에 하루치의 시간과 정성을 들인다면, 그들에게만 허락되는 자연의 넉넉함에 절로 감사할 것이며 오래도록 여운이 남을 것이다.
눈길이라서 아이젠을 착용하면 걷기에 훨씬 수월하다. 등산화 정도로도 우리는 무난했다. 올 겨울, 무거운 마음을 던지고 정신이 번쩍 드는 차갑고 쨍한 하얀 세상을 만나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