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 70년대생 동년배들이 고민하는 이야기를 씁니다.[편집자말] |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몇 주가 지났다. 사망신고를 하면서 아버지의 금융거래나 토지, 세금 등의 재산 정보를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는 '재산조회 통합 처리'를 신청해두었고 이제 막 그 조회 결과가 나왔다.
한 번의 신청으로 결과는 확인되었지만 이후의 처리는 각개전투다. 각 은행별/지점별 제출해야 하는 서류의 차이가 있어 하나하나 유선으로 확인해야 한다. 게다가 부모님 집이 아버지 명의로 되어있어 상속등기 이전을 해야 하는데 법무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하려다 보니 준비해야 하는 서류 또한 만만치가 않다.
아버지의 사망진단서는 몇 번을 봐도 낯설다. 아버지가 응급실로 들어가셨을 때, 누구도 그렇게 빨리 아버지의 임종이 다가올 거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월요일에 응급실에 가셨고, 다음 날 새벽에 중환자실로 들어가셨으며, 이후 하루 만에 돌아가셨다. 누가 뒤에서 쫓아오기라도 하듯, 아니면 반대로 어서 오라고 손이라도 내민 듯 아버지는 그렇게 서둘러 떠나셨다. 살아생전 평소에 자식들한테 부담 주고 싶지 않다고 하시더니 어쩜 가실 때까지 이럴 수가 있을까.
가족을 위한 아버지의 배려였을까
얼마 전 밀린 가계부를 정리하다 영수증 하나를 보았다. 아버지 임종 2분 전, 편의점에서 결제한 영수증이었다. 시속 150km로 달려간다 해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킬 수는 없었다. 감기 기운이 있어 자기 전에 약을 먹었지만, 몇 시간 사이 더 나빠진 남편의 컨디션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앞으로 장례 기간인 3일은 무조건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임시방편으로 쌍화차와 유자차 등을 샀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임종을 앞둔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중에도 말이다.
발인까지 마친 후 오빠는 "우리 아버지, 타이밍 참 기가 막히게 돌아가셨다"라고 눙을 쳤다. 수요일에, 그것도 새벽에 돌아가셔서 가족 중 누구도 출근했다 정신없이 돌아오지 않고 이른 시간부터 장례를 준비할 수 있었고, 군에 있는 조카도 나와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지킬 수 있었다.
덕분에 첫날부터 조문객들이 찾아와 손님이 한꺼번에 몰리지 않았으며, 금요일에 발인을 마치고는 주말 이틀을 쉬면서 아버지의 방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며느리의 병원 일정과 사위의 생일도 피해 갈 수 있었다.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이틀 뒤인 일요일은 사위이자 내 남편의 생일이었다. 장례를 치르는 중은 아니었으니 남편의 생일 미역국을 준비했다. 그렇다고 물론 요란하게 생일상을 차린 건 아니지만 전날 저녁에 그가 좋아하는 고기를 듬뿍 넣은 미역국을 끓이고 몇 가지 반찬을 만들어 두었다. 아버지를 추모공원에 모시고 와서는 남편의 생일 미역국을 끓이는 상황이 무척이나 낯설게 다가왔다.
친정엄마는 발인 후 나와 함께 머물고 계셨다. 남편의 생일은 마침 아버지 방을 정리하러 가기로 한 날이라 근처에 사는 오빠와 올케언니가 집으로 와서 함께 아침을 먹었다. 밥을 먹으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던가. 기억나는 한 마디는 '아버지 덕분에 남편의 생일 아침을 가족들이 함께 먹게 되었다'는 거였다. 마냥 슬퍼만 할 수도, 그렇다고 또 마냥 축하만 할 수도 없는 어색함이 식탁 위에 가득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서는 집 앞 카페에서 작은 케이크를 하나 사와 남편의 생일을 축하했다. 그러고 보니 시아버지의 기일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시아버지의 기일이 되면 오전엔 가족이 함께 모여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고, 저녁엔 조용히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해왔다. 마찬가지로 이제 아버지의 기일이 되면 추모에 뒤이어 다가올 생일 축하도 함께 나누겠구나.
내 곁의 사람과 지금 행복하기
아버지를 보내드리며 느낀 건 삶과 죽음은 이렇듯 너무나 가까이 있다는 것과 지금 당장 행복하자는 거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엔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다. 하물며 죽은 이를 위한 장례를 치르면서도 남겨진 사람들은 쉬지 않고 수많은 선택지 앞에 놓이게 된다.
본격적으로 빈소가 차려지기 전부터 시작해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떡 추가를 하려면 반 말을 할 것인지 한 말을 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고, 또 송편이냐 절편이냐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선택이란 늘 더 나은 쪽,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삶의 방향으로 향해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더구나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고, 결국 언젠가는 이별을 해야 한다. 그 이별은 언제 어떻게 마주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 살아있는 오늘은 내 곁에 사랑하는 사람과 무조건 행복하고 싶다.
이렇게 남겨진 우리는 때때로 슬퍼하고 이따금 눈물 흘리겠지만, 다시 또 웃고 농담하고 행복한 일상을 꿈꾸며 살아간다. 당장 눈앞에 다가온 명절엔 아버지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허전함에 슬퍼하기보다 지금의 소중함을 알기에 서로를 보며 더 많이 웃어야겠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고 있다 해도, 더 나은 선택을 하며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갈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정은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재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