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는 분명히 온몸이 까만 녀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또 갈색 얼룩무늬 녀석입니다.
저 집 어르신은 몇몇 동네 고양이들이 이곳을 마치 제 집처럼 드나든다는 걸 아시는 걸까요, 모르시는 걸까요? 정말로 모를 수도 있고, 아는데 그냥 눈 감아 주시는 걸 수도 있겠습니다.
한갓진 시골 농막, 이게 이렇게도 쓰이는구나
마을 어귀 즈음 비닐로 만든 조그마한 농막 같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곁의 산소도 돌볼 겸 잠시 쉬다 갈 겸 쉼터 용도쯤으로 만들어 두신 듯 합니다.
본래 목적은 그러한데, 그보다는 다른 목적으로 쓰일 때가 더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비어있을 때가 많아서인지 동네 길고양이들이 제 집 안방인 양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으니 말이죠.
특히 날씨가 좀 차갑다 싶은 날 이곳을 지나갈 때면 여지없이 고양이 한 마리가 있습니다. 비닐 농막 안에서 바깥을 구경하거나,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졸고 있습니다. 자신을 쳐다보는 저를 경계하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기도 합니다.
이곳은 시골 마을입니다. 열 가구 남짓 살까요. 저희 가족은 이 마을에 삽니다. 동족마을이라 저희만 외지 사람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저희뿐만 아니라 길고양이도 외지 생명체겠네요. 하지만 이곳은 성씨가 다르다고 텃새가 있거나 하는 일은 다행히도 없습니다. 이곳에 사는 길고양이가 마을에서 특별히 사랑을 받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미움을 받는 일도 없듯 저희 역시 그렇습니다.
불쑥 문을 두드리거나, 예고 없이 찾아오셔서 "안에 있니껴?", "감나무댁 여 안 왔니껴?" 하는 그런 일들도 없습니다. 점잖은 어르신들이죠. 또는 저희 가족에게 그리 큰 관심이 없거나요. 처음에 막 이사 왔을 때나 젊은 사람들이 왜 여기로 오나 하셨지, 이제는 마을 한 편에 어느 가족이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일은 있습니다. 가끔씩 문을 열었는데 집 앞에 무언가가 놓여 있습니다. 그건 빨간 사과나 아삭아삭 오이일 때도 있고 흙에서 막 뽑은 무나 배추일 때도 있습니다. 그때부터 추론이 시작됩니다. 먹을거리를 두고 사라진 오늘의 우렁각시는 과연 누구인가.
사실 범인(?)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굉장히 무뚝뚝하시지만 가끔 제철 과일을 챙겨주시는 옆집 어르신이거나, 아니면 역시나 무뚝뚝하시지만 가끔 제철 농산물을 챙겨주시는 윗집 어르신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윗집 어르신은 여자인 저에게만 무뚝뚝합니다. 남자인 남편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작은 시골마을이지만 텃새도 없고 사생활 침해도 없고 종종 먹을거리도 나눠 주시고.
시골살이, 너무 좋은 이야기만 했나요? 이곳은 고령의 어르신들이 대부분인 만큼 남녀차별이 남아 있는 곳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남자 어르신들을 뵐 일이 그리 많지 않아서 거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작은 시골 마을의 하루는 무척이나 평온합니다. 특히나 요즘같이 추운 겨울에는 개미 한 마리 지나다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할 때도 있습니다. 이따금 저 하늘 높이 비행기라도 지나가면 그 소리가 그나마 가장 큰 소리랄까요.
투박하지만 평화로운 자연 속 시골
집에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어르신 한 분이 마당에 나와 있는 저더러 물으시더라고요.
"거 혼자 들어앉아 뭐하니껴?"
저는 혼자 들어앉아서 집도 정리하고, 마당으로 나와서 쓰레기도 버리고, 타닥타닥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도 합니다. 그냥 웃고 말았지만요.
별 할 일 없을 것 같은 시골에서도 홀로 조용히 분주합니다. 그리고 그 중 빠뜨리지 않고 하는 일 하나는, 괜히 창문 열어보기입니다. 산세가 수려한 곳에 자리 잡은 마을도 아니고, 잘 정돈된 전원 마을도 아니라 눈앞에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 건 아닙니다. 게다가 지금은 겨울이라 농작물이 휑하니 비어있는 밭이 대부분입니다. 투박하죠.
하지만 언제든 창문만 열면 나무, 앞산, 하늘 같은 것들이 보입니다. 오늘만 그런 게 아니라 어제도 있어줬고, 내일도 그래줄 겁니다. 모든 것이 금세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준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물론 시골에 산다고 어디 마냥 평화로운 일만 있을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서울살이든 시골살이든 사람 사는 건 매한가지죠. 살다보면 희로애락 모든 일들이 다 찾아오니 마음이 평화롭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시골은 그저 사람 사는 여러 곳 중 한 곳일 뿐입니다. 다만, 사람 마음이 평화롭든 그렇지 않든, 평화로운 풍경만큼은 여전합니다. 그 속에서 사방으로 흐트러지던 마음 역시 조금 가라앉기도 합니다.
추운 날이 계속되는 요즘이지만 이따금씩 어르신께서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마을길을 걷고 계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날은 바람은 좀 불어도 햇살이 꼭 봄처럼 따스한 날입니다.
놀랍게도, 곧 입춘이더라고요. 점점 봄이 다가오면 아무도 없는 듯 조용하던 이곳에 색과 소리가 입혀질 겁니다. 앙상한 가지를 단 나무들이 서 있던 앞산은 서서히 연둣빛으로 물들 테고, 꽃도 피겠죠.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에 봄의 화사함이 더해질 겁니다. 겨울잠 자듯 쉬고 계시던 어르신들도 밭 위를 오가실 테고, 경운기 소리도 들릴 겁니다.
그때쯤이면 비닐 농막에 들어가 있는 길고양이들도 더는 보이지 않겠죠. 아마도 어느 양지바른 곳에 앉아 해바라기를 할 겁니다. 저 역시 창문을 열어보는 일보다는, 문 밖을 나서는 일이 더 많아질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시골에서의 평범한 일상이 흘러갑니다.
덧붙이는 글 | 위 글은 글쓴이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tick11)에도 함께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