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우의 지방의회에 대한 소소한 생각(이하 '이지소')>은 8년간 기초의회와 광역의회 임기제 전문위원으로 겪은 필자의 소소하지만 특별한 이야기입니다. '이지소'에는 필자의 「나는 지방의회에서 일한다(에이원북스, 2022)」를 수정·보완하여 기초의회의 이모저모를 소개합니다. 지방의회를 좋게 바꾸고 싶다면 우선 지방의회를 오래 자세히 지켜봐야 하기 때문입니다.[기자말] |
"전문위원님, 이 많은 자료를 어떻게 봐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답답하시죠. 이렇게 저렇게 하시면…"
A 의원의 눈이 어느새 빨갛게 충혈되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첫 티타임 자리였던 터라 나역시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이 여성 구의원은 전문위원 앞에서 왜 눈물을 흘려야 했을까.
그날은 구의원의 임기가 시작되고 두 달여쯤 지난 어느 늦은 오후였다. 전반기 의장선거와 업무보고를 위한 두 번의 임시회가 있었고 결산심사와 안건심사를 위한 임시회 기간의 끝 무렵이었다. 상임위 회의장을 정리하던 나는 여전히 의원 좌석에 시무룩하게 앉아 있던 그에게 차를 마시겠냐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상임위 회의 내내 별다른 발언도 없고 아침부터 표정이 어두워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임위 회의장 한 켠에 마주앉아 첫 티타임을 가졌다. 상임위에 상정됐던 안건의 쟁점부터 구정질문 준비요령, 민원처리 절차까지 의정활동 전반으로 질문은 확산됐다.
8년 간 전문위원으로 일하면서 A의원처럼 원내 의정활동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걱정하는 구의원을 많이 만났다. '원내 의정활동'이란 의회 안에서 각종 안건을 심사하거나 상임위나 본회의에서 발언하거나 질의하는 것을 말한다. 외유성 해외연수만 다니는 불량스런 지방의회의원만 있는 줄로 안다면 지방의회에 대한 큰 오해이다. 언론보도에서 보듯 천박하고 함량미달인 지방의원도 더러 있지만 국회나 오랜 정당생활로 지방의회에 친숙하거나 원내 의정활동에 진심인 지방의회의원도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원내 의정활동에 대한 고민은 초선의원만 하는 건 아니다. 재선 구의원 중에도 조례안, 예산안, 결산안 심사를 앞두고 자료를 어떻게 분석하고 질의할지 몰라 속으로 끙끙 앓는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한 초선 여성 구의원, 석사졸업 학력의 초선 50대 남성 구의원도 비슷한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다. 광역의회 의회사무기구 정책지원 인력의 질과 양의 차이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서울시의원은 그런 모습이 적었다. 서울시의원 중에는 구의원 경력을 가진 의원이 워낙 많다보니 원내 의정활동에 익숙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대한민국 선출직 정치인은 대통령부터 시·군·구의원까지 다양한데 유독 시·군·구의원처럼 기초의원이 원내 의정활동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했을 때 원내 의정활동을 잘할 수 있는 능력있는 인재가 정작 지역구 국회의원의 눈밖에 있어 기초의원으로 공천되지 못하는 제도의 허점, 기초의원의 원내 의정활동을 지원하는 의회사무기구 정책보좌 인력의 부족, 집행기관 공무원과의 관계설정 문제 등을 그 원인으로 꼽고 싶다.
지방의회의원이 잡아야 할 세 마리 토끼
무엇보다 지방의회의원이 원내 의정활동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배경에는 ① 지역구 관리 활동, ② 정당 활동, ③ 원내 의정활동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원내 의정활동이라는 토끼는 가성비(價性比)가 가장 낮다. 초선의원일수록 관료집단의 생리를 파악할 때까지 적잖게 애를 먹기도 한다. 앞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원내 의정활동을 더욱 잘하기 위한 것이어야 타당하다. 그래야 지방의회가 중앙정치에 덜 예속되고 생활정치에 입각해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난다. 지방의회 원내 의정활동이 정당 활동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때가 훨씬 많다. 예를 들면 중앙당 또는 광역시당의 행사나 지역구 국회의원의 행사에 참석하느라 임시회나 정례회 기간 중에도 지방의회의원이 상임위나 본회의에 빈번하게 결석하는 경우이다. 소위 지방의회가 중앙정치에 예속되어 국회의원에게 '동원'되는 셈이다. 유권자인 주민이 지방의회의원 개인보다 대개의 경우 소속정당만 보고 투표하는 현실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결국 그 지방의회의원에게 투표한 지역주민들을 속이는 처사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지역구 관리나 정당 활동은 열중하면서 원내 의정활동은 그저 출석하는 정도쯤으로 여기는 다선 구의원도 많이 봤다. 원내 의정활동의 성과 여부가 실제 기초의원 공천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원내 의정활동을 가장 중심에 놓고 중앙정치와 협력하되 지방의회의원 스스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현역 지방의회의원이 원내 의정활동이라는 세 번째 토끼를 우수하게 잡을 경우 다음 선거에서 공천이나 당선을 유력하게 해주는 정당 공천제도 개혁이 절대 필요하다. 그래야 국회의원이나 공무원이 아닌 주민들의 요구에 귀를 귀울이는 '진짜 지방의회'를 경험할 수 있다.
왜 집행기관 공무원 앞에만 서면 기초의원은 작아지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드러내 놓고 티를 내지 않을 뿐 대체로 집행기관 공무원들은 관련 지식이 많지 않은 지방의회의원을 좋아하지 않는다. 수십 대 일의 7·9급 필기시험 경쟁을 뚫은 자신들에 비하면 군의원이나 구의원은 전문성도 없으면서 어쩌다 공천을 받아 기초의원이 됐는데 무턱대고 큰소리만 친다고 생각한다.
행정안전부가 2021년 3월 발표한 <제8기 후반기 지방의회 현황>에 따르면 지방의회의원의 직업별 현황은 광역의원의 경우 전임(專任) 지방의원 534명(64.5%), 기타 158명(19.1%), 상업 34명(4.1%), 교수 24명(2.9%), 건설업 16명(1.9%) 등이고 기초의원의 경우 전임(專任) 지방의원 1,834명(62.8%), 기타 471명(16.3%), 상업 233명(8.1%), 농업 145명(5%), 회사원 28명(1%) 등이다.
의정활동 경험이 적은 기초의원일수록 '공무원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라고 생각하기 쉽다. 필자의 경험상 이것은 마치 모든 직장인은 성실하고 열심히 일한다고 단정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정년이 보장되고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지방공무원도 엄연히 직장인이다. 승진을 위해 성과와 근무평가 관리를 하느라 상사와 동료의 눈치를 살피기도 하는 사람이 공무원이다. 승진이나 평가와 직접 관련이 없는 업무는 감사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처리할 때도 있다. 3년 안에 당장 승진할 게 아니라면 똑같은 월급을 받으면서 적게 일하려는 심리는 공무원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초선 지방의원일수록 집행기관 공무원과 관계설정에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기초의회는 광역의회와 그 양상이 많이 다르다. 광역의원은 선거구가 기초의원에 비해 넓고 집행기관의 규모가 크다보니 공무원의 '익명성'이 보장되기 쉽다. 원내 의정활동 과정에서 업무 외엔 본인 지역구 공무원과 지방의원이 딱히 마주칠 일이 적다는 뜻이다. 그에 비하면 시·군·구의회의 기초의원은 집행기관 공무원들이 의원의 지역구에 주소지를 두고 있는 유권자일 경우가 많다. 구의회 상임위에서 혼을 냈던 담당과장이나 팀장이 해당 구의원의 지역구에 있는 아파트에 거주한다거나 심지어 그 과장이나 팀장의 배우자가 아파트 동대표라면 그 구의원의 심경이 어떻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내 경험에 따르면, 기초의원일수록 당선되기 전부터 이미 오랜 지역활동을 통해 집행기관 직원들과 구면인 경우가 많았다. 광역의회에 비하면 시·군·구 공무원과 시·군·구 의회의원의 관계는 이미 '끈끈한' 편이다. 구청과 같은 기초자치단체 직원은 퇴직 때까지 시청같은 상급지자체에 파견근무를 하거나 다른 지자체로 전출을 가지 않는 한 거의 해당 지자체를 떠나지 않는다. 기초의원으로 공천되는 사람도 지역의 유지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에서 법만큼 중요한 것은 '형님, 동생 문화'이다. 전형적인 대면행정이다.
예전에 어느 구의회 다선 의장의 제안으로 행정직 전문위원과 식사를 하면서 놀랐던 적이 있다. 함께 식사를 하던 행정직 전문위원은 정년 퇴임이 몇 년 남지 않은 5급이었고 얼마 전까지 구청에서 과장으로 있었다. 동네 동호회 십수년 역사와 개별 회원들의 근황까지 구체적으로 주고받는 의장과 행정직 전문위원의 대화를 들으면서 필자는 두 사람의 오래되고 끈끈한 관계를 실감했다. 그와 동시에 이토록 가까운 다선 구의원과 근무경력이 오래된 공무원 사이에서 과연 집행기관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구의회의 역할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똑같은 지방의회의원이지만 기초의원은 광역의원과 다르다는 말을 하는 이유이다. 원내 의정활동에 대한 기초의원의 전문성을 논하기 전에 이런 사적인 친밀 관계는 가수 김수희의 히트곡 '애모'의 가사처럼 기초의원이 집행기관 공무원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초의원, 제대로 하려면 결코 쉽지 않은 직업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초의원은 밀접한 관계 속에 있을지도 모를 관료집단의 무사안일(無事安逸)을 짚어야 한다. 주민들이 지방의회에 바라는 역할이 그렇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집행기관 직원을 도둑으로 보자는 것은 아니다. 지자체장의 공약을 이행하거나 공직 입문 당시 첫마음으로 일하려는 공무원도 많을 거라고 믿는다. 지방의회의원 입장에서도 수시로 발생하는 지역 민원을 조금이라도 신속히 처리하기 위해서는 공무원의 협조가 중요하다. 어차피 일은 공무원이 하니까. 이렇다 보니 지방의회의원이 잡아야 할 세 마리 토끼는 대체로 공무원과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필요하다면 기초의원은 공무원의 웃는 낯에도 기꺼이 비판적인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국회의원에게 수시로 동원되고 지역 민원 처리에 치이면서 공무원에게 휘둘리기 쉬운 것이 대다수 기초의원의 현실이다. 기초의원이 원내 의정활동을 잘하고 싶어도 못 하는 주된 이유이다. 기초의원은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직업이다.
덧붙이는 글 | 한국자치발전연구원이 발행하는 월간 <자치발전>에도 수정, 보완하여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