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의 끝자락. 첫째가 지난 주말부터 귀에 딱지 앉도록 노래 부르던 한밭수목원엘 갔다. 두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기란 늘 그렇듯 참 고되다. 밥 먹이고 옷을 입히고 짐을 꾸리고. 외출이란 말은 참 쉽지만 그에 수반되는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다.
현관문 밖을 나서기까지 집에서 할 일 리스트를 머릿속에 그리자면 가슴이 턱 막혀온다. 그런 연유로 지난 주말에도 어찌저찌 설득해 집에 머물렀으나 이번 주말엔 기필코 나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젠 귀에 딱지가 아니라 피가 날 정도로 첫째의 노래가 계속 될테니까.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채 차에서 내리는 첫째와 둘째에 반해 우리 부부는 연휴 끝 밀려든 피로를 얼굴에 잔뜩 묻힌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들을 뒤쫓는다. 추울 거란 예상과는 달리 막상 나오니 은근한 온기를 품은 바람이 기분 좋게 얼굴을 스치는 날이었다.
오늘따라 수목원은 여남은 연휴를 만끽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두 아이들은 신난 발걸음으로 그 사람들 속으로 유유히 헤엄치듯 섞여 들어갔다. 벌써 대여섯 번은 온 곳이지만 첫째의 렌즈에는 매번 새로운 것들이 담기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름의 코스인 곤충박물관, 열대식물원을 물 흐르듯 유유히 다녔다.
그러다 넓은 광장으로 나와 걷는데 한 무리의 자전거 일행들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다. 부러운 눈으로 물끄러미 보던 첫째가 눈을 반짝이며 "우리 저거 탈까?"라고 제안해왔다. 아이들을 따라다니느라 기진맥진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좁혔지만 너무도 애절한 첫째의 눈빛에 좁아졌던 미간이 제자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자전거 대여소로 들어가 30분에 7000원을 결제하고 빨간 천장을 뽐내는 자전거가 세워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아이를 앞좌석에 태우고 숨을 고른 뒤 우리 부부는 뒷자리에 털썩 탑승했다. 우리가 합을 맞춰 페달을 밟자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갔고 앞에 앉은 두 아이는 신이 나는지 엉덩이를 들썩였다. 페달을 밟으며 우리는 30분이 얼른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때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기분좋게 우리 귓가에 흘러들었다. 그 웃음소리에 페달을 밟은 양다리에 살짝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전거를 타고 나아가다보니 우리를 스쳐가는 사람들. 풍경들이 마치 필름처럼 쓰윽 지나갔다. 아이들의 웃음을 멎지 않게 하려고 쉴새없이 페달을 밟느라 다리가 아려왔지만 귀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눈으로는 한가로이 지나가는 풍경들에 취해 조금은 버틸 만했다.
그러다 다리 근육에 힘이 풀려 내가 잠시 쉬면 남편이, 남편이 쉬면 내가, 끝이 없는 이어달리기 속 서로가 바통 터치를 하듯 조금의 쉼을 주며 나름의 고통분담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자전거를 타고 가다 그런 고통이 조금씩 덜어지는 순간들이 몇 번 우리의 가슴에 스몄다.
먼 발치서 우리를 향해 보내는 따스한 시선들이 느껴지던 순간들. 앞자리에 앉아 꺄르륵 웃는 아이들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연세지긋한 노부부의 따스한 시선. 입모양으로 귀엽다라고 하시는 한 아주머니 일행들. 그날의 햇살보다 따사로운 그런 시선들을 받다보니 괜스레 페달을 밟는 다리에 더욱 힘이 실렸다. 그러던 중 코너를 돌다 무심코 들려온 나이 지긋한 한 아저씨의 한 마디.
"저럴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지난 세월을 탄식하듯 내뱉으신 그 말이 내 귓가에 흘러들어왔고, 이상하게도 자전거를 타는 내내 그 말이 쉬이 떠나지 않았다. 짧지만 강렬한 한 마디. 속사정을 알길 없지만 아저씨는 무심하게 흘러가버린 자신의 세월을 우리의 모습을 통해 아쉽게 반추하고 있는 듯했다.
내겐 그 말이 저럴 때는 순식간에 지나가니 그 순간을 즐기라는 말로 들려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 앞좌석에 두 아이를 태우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뒤에서 열심히 발을 굴리는 이 평범한 순간이 어쩌면 가장 행복한 순간이자 찰나의 순간이 아닐까 하고. 그리고 이 작은 발짓으로 아이들을 깔깔 웃게 만드는 순간도 인생을 놓고 보면 짧은 한순간일지도.
육아의 터널 초중반을 걷고 있는 우리는 늘 하소연 하듯 말한다 "애들 키우기 왜 이리 힘들까? 언제쯤이면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외출 좀 안 할 수 없나". 육아가 가진 어두움만 보느라 지금의 찬란한 봄을 제대로 못느끼고 있는 것이다. 한창 육아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우린 지금 당장의 힘든 현실에만 급급해 그 시간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저씨도 우리 나이 땐 자전거 안에서 페달만 밟느라 그 시절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못한 채 세월을 무심히 흘러보내셨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른 뒤, 자신과 닮은 우리의 모습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듯 멀리서 보다보니 지나가버린 그 순간은 찰나이니 순간을 소중히 하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던져주신 건지도 모른다.
아저씨의 말을 무심코 흘려보냈더라면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며 힘들다 다리 아프다는 하소연만 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미소, 아름다운 자연의 색채 등을 못 보고 홀연히 그 시간을 흘러보냈을지 모를 일이다. 우연히 흘러든 한 아저씨의 말을 꼭 붙든 것은 어찌보면 참 감사한 일이구나 싶었다.
페달을 밟는 한 사람의 다리가 아프면 또 다른 사람이 밟아주고, 서로 힘을 주고 빼기도 해가며 너무 무리하지 않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 스쳐가는 풍경들에도 촉수를 세워 그 순간을 오롯이 즐기며 소중한 추억들을 마음에 새기는 것. 나중에 나이가 들어 인생을 망원경으로 볼 수 있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 지금의 우리가 해야할 일들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네 바퀴째 돌고나니 어느새 정해진 30분이 지났다. 자전거에서 아쉽게 내리며 앞으로 인생에서 아이들과 보낼 찰나와 같은 30분을 1분1초가 아깝지 않게 보내야겠다고. 지금 이 순간에만 할 수 있는 경험들을 함께 해내며 많은 추억들을 가슴 속 깊이 켜켜이 쌓아두어야 겠다고 다짐한다.
수년 후 언젠가 남편과 손 붙들고 이곳 한밭수목원을 산책하며 먼발치서 자전거타는 가족들을 보거든 "저럴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자전거 페달을 굴리며 다리는 참 아팠는데 날도 좋고 애들도 참 많이 웃었던 날이었지" 하며 가슴 속 깊이 묻어둔 일들을 어제일 처럼 생생히 꺼내며 기분좋은 추억에 잠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