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 3기입니다.[편집자말] |
몇 년 전 얼떨결에 출판 계약을 했다가 엎어진 일이 있다. 브런치에 올린 글들을 보고 한 편집자에게 연락이 왔고 두 번인가 미팅 후 그가 계약서를 내밀었다. 내 글이 내게나 좋지, 날 모르는 이들에게도 공감이 될 수 있을까 싶은 의구심에 주저하며 거절의 뜻을 잠시 비추었지만, 글에서 상품이 될 만한 뭔가가 보이는지 그래도 내 글이 좋다는 편집자를 믿으며 도장을 찍었다.
하지만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는 흥분과 설렘도 잠시. 이후 편집자는 계약 수개월만에 이직을 해버렸다. 그리고 내 글은 지금까지 수정본으로 붕 떠 있는 상태다. 앞 일을 단정할 수는 없으나,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책 출판에 대해 여러 가지 궁금증이 자연스레 생겼다. 그 편집자는 왜 계약하자고 했을까, 내 글은 어떤 점이 부족한가, 그리고 성공적으로 출판되는 글은 도대체 어떤 글인가 등등.
그러던 중 팟캐스트 라디오 책방 프로그램을 듣다가 한 책이 번쩍 귀에 꽂혔다. 베스트셀러 에세이 만들기로 유명한 문학동네 이연실 편집자의 <에세이 만드는 법>이 소개되고 있었는데, 마침 궁금하던 것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다!' 싶어 바로 책을 구입하고 휘리릭 단숨에 읽어 내렸다.
책이 될 에세이
과연, '계약서를 꺼낼 때와 집어넣어야 할 때'라든가, '생활의 달인들을 작가로 만들기' 등의 꼭지에서 저자는 자신만의 책 만드는 기준을 명확히 밝히고 있었다. 저자는 기성작가든 신인작가든 최소 예상 판매 부수가 편집자 스스로 납득 가능한 수준이 되어야만 계약서를 꺼낸다고 한다. 또한 비관적으로 잡은 최소부수임에도 초판 소진이 어려울 것 같거나 투입되는 노력대비 최소부수가 너무 적을 때에도 계약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짧게 말하면, 계약하려면 무조건 팔릴 만한 원고여야 한다는 것! 아마 나와 계약했던 편집자와 출판사도 이 기준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결국 내 글은 계약당시엔 팔릴 만한 원고 축에 끼었지만 막상 계약 후엔 팔릴만하지 않다고 판정 났으리란 추측을 뼈저리게 해 볼 밖에. 첫 출판에 제동이 걸린 나로서는 무척이나 상심할 일이지만, 손실을 보지 않아야 하는 출판사 입장이 헤아려지지 않는 바도 아니다.
책을 통해 나의 출판이 왜 좌절되었는지 궁금했던 점들이 어느 정도 풀리자 상황이 수긍되고 한결 담담해졌다. 그리고 다음 기회를 도모하는 의미에서, 팔릴 작가는 그럼 어떻게 찾아지고 섭외되는가에 대한 내용으로 자연스레 관심이 옮겨 갔다. 출판사 입장에선 팔릴 만한 저자와 계약하는 일이 관건일 것이고, 그러자면 잠재 독자층이 확보된 유명인을 우선 고려해 봄 직하다.
이연실 편집자 역시 에세이가 셀럽과 미디어 유행의 영향을 직격탄으로 받는 분야임을 책에서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인기 인플루언서라 해도 무턱대고 책을 내자고 제안하지 않는다고 한다. 저자는 유명인의 sns 팔로워 수와 인지도에 속지 말 것을 당부한다. 진정 책이 될 만한 스토리와 맥락을 지녔는지, 그리고 그 내용이 다른 콘텐츠에서는 볼 수 없었던 깊이 있고 차별화된 내용을 지닌 인물인지를 가늠하고 가려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런 기준으로 저자가 만들어 성공한 책은 하정우의 <걷는 사람, 하정우>, 김이나의 <김이나의 작사법> 등이다. 의외로 좋은 에세이가 될 만한 내용을 가진 유명인은 생각보다 극소수라고 저자는 덧붙인다.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사는 유명인들 중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다는데, 하물며 팬덤도 없고 상대적으로 단조로운 일상을 사는 일반인들 중에서 적합한 인물을 발굴해 내고 검증하는 일은 더 험난할 것이다.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선 책이 될 인물을 발굴하기 위해 이런저런 다양한 방안들을 강구하고 구사하나 보다. 방편이 다양할수록 좋은 작가를 찾아낼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책에 따르면, 편집자들은 대개 각종 잡지와 콘텐츠들의 구독에 상당한 경비를 지출하며, 다양한 이슈와 인물들에 대한 검색의 대가라고 한다. 이연실 편집자는 여기에 더해 자신만의 덕질을 추가한다.
좋아하는 사람, 열렬한 팬심을 가지게 만드는 이를 오랫동안 덕질하다 책 만드는 일로 직접 만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성덕이 되는 길이라며. 자신의 최애를 자신의 일로 만날 수 있다니! 편집자라는 직업에 급호감이 생기고, 자신의 노력을 보태 출판으로 인물을 구현시켜 내는 이연실 편집자의 열정에 내심 감화가 된다.
좋은 작가를 발굴하려는 노력은 국내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저자는 해외 에이전시 레터를 뒤적이고 '아마존'을 탐험하면서 만들고 싶은 책과의 접점을 찾아 매력적인 기록의 조각들을 쌓아둔다고 한다. 그렇게 탄생한 베스트셀러 중 하나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였다고 한다.
글보다 단단한 삶이 먼저
이쯤 읽고 나니, 나의 시시한 처지가 어찌나 선명히 부각되는지 움츠려 들 수밖에 없다. 이슈가 된 적도 없고, 팬심을 불러일으킬 사연도 딱히 없는, 해외저명 작가는 더더욱 아닌, 그저 시들하게 살아가는 무명인일 뿐인 나의 처지 말이다. 평생 팔릴 작가가 되기는 만무하겠구나 싶어 기가 죽으려는데, 저자는 책 막바지에 대뜸 이런 구절을 미끼처럼 던진다.
"에세이 편집자의 작가는... 거리에, 출근길 만원 버스와 전철에, 시장에, 가게에, 정신없이 돌아가는 회사에, 이름도 몰랐던 시골 마을에, 세상 방방곡곡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하며 생활하고 있다... 아직 원고를 써 본 일은 없지만 이미 삶 자체가 책 보다 아름다운 사람, 예술가가 되기 전의 생활인, 자기 자신의 업과 삶에 어떤 허영이나 자만도 없이 하루하루를 묵묵히 쌓아 저절로 대가나 달인이 된 사람... 그런 이들의 울퉁불퉁하고 유일한 이야기를 찾아서, 나는 오늘도 책 밖의 세상을 기웃거린다."(157쪽)
무엇보다 '자신의 업과 삶에 어떤 허영이나 자만도 없이 하루하루를 묵묵히 쌓아 저절로 달인이 된 사람'이란 구절이 탁 걸린다. 출판하고 싶은 욕심만 내세워 자격미달됨을 한탄만 했지, 정작 스스로의 일상을 단단하게 꾸려왔는지, 하고자 하는 일에 진심으로 열정을 다해 살아왔는지에 대해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있기 때문이다.
출판을 희망하는 나 같은 일반인 독자를 위로하고 포용하기 위한 의도적 문구가 아닌가 하는 일말의 미심쩍음도 느껴지지만, 옳은 말이다. 글보다 단단한 삶이 먼저라는 사실에는 한치의 이견이 없으니까. 이런 관점에서라면 내 일상을 충실히 열정적으로 살아내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삶이 빈약하고 추레한데 성숙한 경험치가 쌓일 리 만무하고 그 빈약한 삶에서 뽑아낸 글이 타인에게 감동을 줄 수는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므로.
예술적 경지에 오를 정도의 아름다운 일상을 일궈낼 수 있다면 편집자의 검색에 걸려들지 않는다고 낙심할 일이 아닐 것이다. 성실하기 위해 쏟은 땀과 눈물로 점철된 인고의 시간은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 터이고, 꼭 출판으로 보상받지 않아도 이미 삶은 충만할 테니 말이다.
덧붙여, 책 <에세이 만들기>에는 책 한 권을 출판하기 위해 편집자가 얼마나 애를 쓰는지 그 고충을 엿볼 수 있다. 교정, 띠지 만들기, 북 디자이너와의 협력, 마케팅, 보도자료 만들기 등 흥미 있게 다루고 있으니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