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 3기입니다.[편집자말] |
박진서의 <구로동 해리티지>는 구로공단으로 통칭되는 한 동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명한다. 태어나서 20년이 넘게 구로동에 거주하며 변화를 지켜봐 온 토박이로서 구로동의 역사와 문화, 다양한 삶의 모습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작가는 사람들이 지역을 바라보는 시선을 세 가지로 이야기한다. 60대는 '구로공단'의 이미지로, 80년대 생은 구로디지털 단지라는 'IT산업 밀집 지역'의 이미지로, 20-30대는 '중국인 밀집 지역' 또는 영화에서 등장하는 '우범지역'의 이미지로 기억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오해와 편견이 담긴 세 가지 언어의 이면을 포착해서 구로동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수십 년의 역사 속에서 구로공단, 디지털 단지, 중국인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뽑아 든다. 이 열쇠 말속에 초기 산업화에서부터 고도 정보화 사회까지 달려온 한국 사회의 숨 가쁜 질주가, 저임금 노동의 공급국에서 수입국으로의 드라마틱한 변신이 집약되어 있다. 구로동은 한국 현대사의 비밀이다. 사실 구로동은 어디에나 있다.(표지의 말, 조형근)
'구로동은 한국 현대사의 비밀'이라고 하는 말에는 많은 것이 함의되어 있다. 작가와 살았던 시간도 세대도 다르지만 나 역시 구로동에 기대어 온 삶이 길다. 옛 구로공단, 현 가산동은 결혼 전까지 30년 가까이 내가 살았던 공간이었다. 이후 다시 20년을 넘게 주변인으로 친정이 있는 동네를 바라보기도 했다. 책의 제목이 눈이 간 것은 아마도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로부터 외면하고 싶었던 지난 시간을 제대로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60년대생인 나 역시 그곳은 '구로공단'이라는 시각의 틀에 가두고 있었다. 말이 좋아 산업역군이고 경제성장을 주도했으며 달러 벌이의 기지였지, 내게는 회색빛 담장과 굴뚝의 시커먼 연기로 대표되는 삭막한 공간이었다. 조금 더 들어가면 철야노동과 노동착취에 대항하는 시위의 현장이었으며, 경찰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피 흘리며 사지를 결박당한 채 끌려 나오던 어린 노동자들의 모습이 흑백의 사진으로 뇌리에 박제된 곳이기도 하다.
상처뿐인 노동현장의 이미지를 가리기 위해 이후 첨단 디지털 단지로 변화를 꾀하지만 노동 환경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장시간의 저임금 노동, 근로기준법이 예외적으로 적용되는 5인 미만의 사업장이 즐비한 곳. 근골격제 질환을 유발하는 비좁고 밀폐된 노동 공간에서 화이트 칼라 노동자들은 육체적 고통과 함께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작가는 진단한다.
첨단 산업에서 노동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중소기업과 외주 노동자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다. 심지어는 자유로운 조직 문화를 내세우는 네이버나 카카오에서도 근로자의 처우와 관련한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p.109)
책을 통해 구로동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니 안타까운 부분이 많다. 구로동의 변신을 주도하는 사람들, 그들의 시도는 단지 노동자를 감추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본질을 감추기 위해 겉만 화려하게 포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국가 주도 성장을 이끌었던 수출 기념탑과 첨단 산업이라는 이미지 변신으로는 구로동이 오래 품고 있는 오해와 편견을 지울 수 없다.
구로동의 역사는 노동과 사람, 노동과 기술에 이어 노동과 이방인의 결합으로 연결된다.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의 삶이 중심에 있다. K-장녀의 원조격인 여성 노동자들의 애잔한 삶이 있었고, AI를 학습시키는 데이터 레이블러와 같은 저숙련 단순 노동자들의 삶이 있었으며,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가족과 헤어져 타국에 정착한 이주민들의 삶이 있다.
세계적 명품 에르메스는 솜씨 좋은 가죽장인의 노동과 열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회사의 CEO는 "에르메스는 럭셔리 회사가 아니다. 최고 품질의 상품을 만드는 장인 기업이다. 에르메스에는 마케팅 부서가 없으며, 최고의 소재를 구해 장인들이 수십 시간에 걸쳐 완성한다"라고 브랜드 철학을 말한다. 긴 시간 이어져 온 노동의 가치를 명품으로 전환시킨 대명사가 에르메스라고 할 수 있다.
SBS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나는 명품을 만들어 내는 장인들의 열전이라고 생각한다. 초단위로 지나가는 공정에서 오로지 두 눈만으로 티끌만큼의 오류를 찾아내고,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생산 라인의 마감을 두 손의 감각만으로 오차 없이 완성해 내는 사람들. '생활의 달인'들이 완성하는 명품 생산라인의 원조는 '메이드 인 코리아의 전성시대를 연'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은 아니었을까.
노동과 환경의 문제는 구로동이라는 지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당시 서울의 변방이었던 구로동, 경기도와 맞닿아 있는 접경지, 중산층의 거주지역과는 거리가 있어 공장을 건립하기에도 용이하고 서울과의 접근성도 높았던 곳이 수출의 동력이며 메이드 인 코리아의 전성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p.159)
모든 노동은 삶을 위한 것이다. 노동의 현장은 노동자의 삶을 돌보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매일같이 노동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참사는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증명하는 듯하다. 더는 노동과 건강이 동떨어진 단어가 아닌 세상을 만나고 싶다. '세상의 모든 노동자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외형을 바꾸기보다는 노동 환경을 개선하고 노동자의 삶을 키우는 일에 집중했으면 좋겠다.
세상의 모든 노동자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다치지 않고 무사히 매일의 일과를 마치고 평온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건강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단 한 사람도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p.151)
마지막으로 구로동은 '한때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던 기억'의 현장이며 민주화의 산실이다. 오늘의 민주화와 민주 정치의 토대는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연대와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 백기완 소장과 고 김지하 시인, 고 김근태 전 장관' 등이 '자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빨갱이'라는 탄압을 견디며 지금의 민주정치의 기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구로공단의 노동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구로동 사람들의 삶과 역사, 동네 구석구석을 새롭게 만날 수 있었다. 벗어나고 싶었던 공간, 외면하고 싶었던 동네였는데, 이제는 오래된 내 삶의 터전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인정하고 긍지를 가지고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