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고유한 최애 음식이 있고, 매 끼니마다 새로운 음식을 먹고 싶은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지만, 나에게는 가끔씩 꼭 먹어줘야 하는 숙명 같은 메뉴가 있다. 일명 '섞어 비빔밥'이다.
애매하게 남은 반찬, 몇 차례 밥상에 올라가 다시 올리기는 왠지 낯부끄러운 반찬, 하지만 그냥 버리기에는 너무 죄스러운 반찬. 나는 냉장고 속 그들에 애증을 느끼며 그것들을 한데 모아 밥과 비벼먹는다.
물가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찬 한 가지를 만드는 데 얼마만큼의 정성이 들어가는지 알기 때문에 함부로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직접 만든 게 아니라 엄마 찬스로 얻은 반찬일지라도 그것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정성과 마음이 들어가는지 알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주부의 숙명에도 광명이 들어차는 때가 있는데 바로 정월대보름 즈음이다. 손이 큰 양가 어머니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 집에 각종 나물을 선사해 주셨다.
곧 보름이라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하고 아이와 병원에 갔던 어느 날, 시어머니는 빈집에 귀한 음식을 배달해 주고 가셨다. 시원시원하고 손 큰 종갓집 며느리답게 나물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깊이는 낮으나 폭이 12인용 전기밥솥에 맞먹는 널따란 반찬통을 보니 마음이 뭉클했다. 저걸 다 채우려고 또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까.
팥죽색 고무뚜껑을 여니 가운데 동그란 원을 중심으로 갈라진 반찬통 사이사이 갖가지 나물이 그득했다.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어머님의 반찬통은 개선문을 중심으로 한 파리의 방사형 도로들을 연상케 했다. 날짜를 짚어보니 대보름은 3일 후인데 언제 이렇게 부지런히 준비하셨는지… 나와는 반대로 매사 미리미리 준비하고 계획하는 신랑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대보름 3일 전부터 나는 냉털이 아닌 나의 강력한 의지와 희망에 따라 '고오급' 섞어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커다란 대접에 밥을 적당히 덜고 갖가지 보름나물을 얹는다. 평소에 먹던 콩나물, 시금치처럼 푸릇푸릇하고 흔한 나물이 아니다. 취나물, 고사리, 시래기, 토란, 그리고 색과 모양이 비슷한 몇 가지 나물들. 대부분 뜨거운 계절을 지나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처럼 갈색 빛을 띠는 아이들이었다.
어머님이 해 주시는 나물들은 항상 내 입맛을 돋았다. 물기가 자작자작하고 간간한 나물들은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밥에 비벼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거기에 달걀 프라이를 하나 얹고 시골에서 직접 짠 들기름 한 스푼에 초고추장을 한 번 휘리릭 둘러주면 입맛 없는 아침에도 한 그릇 뚝딱이었다.
그리고 친정 엄마도 슬슬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남편과 내가 어머님 나물을 바닥낼 즈음, 두 번째 보름나물과 오곡밥이 도착했다. 엄마의 나물은 어머니 나물에 비해 수분이 적고 깔끔한 스타일이다. 이러나저러나 맛있는 건 매한가지다.
더 좋은 건 어머니가 해 주셨던 나물 말고 새로운 나물들도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고구마순, 호박고지, 또 이름 모를 갖가지 나물들. 요즘 채식에 푹 빠져 비건을 부르짖는 남편도 신이 나 맛있게 비벼 먹는다.
그리하여 나는 근 일주일간 하루에 한 번 이상 비빔밥을 먹고 있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누군가 한 가지 음식을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입맛이라 했다. 밥 한 끼를 차리는 데 매번 얼마만큼의 노력과 고민과 정성이 들어가는지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어떤 반찬을 하지? 어떤 메뉴가 좋을까? 머리를 굴리는 대신, 아무 생각 없이 냉장고를 열어 그냥 섞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간편한지. 게다가 맛도 좋고 영양소도 풍부하다. 그저 아이들이 나처럼 나물 비빔밥의 진가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쉬울 따름이다.
하지만 나 역시도 어릴 때는 나물의 맛을 알지 못했다. 어릴 적 껌을 씹으며 딱딱 경쾌한 소리를 내는 엄마를 신기하게 바라본 적이 있다. 어떻게 그런 소리를 낼 수 있냐고 묻는 내게 엄마는 "어른이 되면 저절로 돼"라는 다소 성의 없는 답변을 하셨다.
근데 정말 아무리 해도 따라낼 수 없었던 그 소리가 어느 순간 저절로 나왔다. 아마 인생이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걸 조금씩 느껴가던 대학 시절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가끔 소화가 안 될 때면 약 대신 매실차를 진하게 마시고 껌을 씹는다. 어른만이 낼 수 있는 소리를 딱딱 내면서... 그럼 딸아이도 날 신기하게 쳐다보며 묻는다.
"엄마 그 소리 어떻게 내는 거야? 난 안 나는데?"
"음... 그냥 씹기만 하면 되는데... 땡땡이가 어른되면 그냥 대충 씹기만 해도 재밌는 소리가 날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봐."
나 역시 더 참신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딱딱 소리를 내며 껌을 씹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우리 아이들도 이 비빔밥을 좋아하겠지? 까마득한 그날을 생각하며 오늘 아침도 비빔밥을 비빈다. 그때가 되면 나도 나물을 무치다 어머니들을 생각하겠지. 오늘 내 입맛은 정성어린 그녀들 덕분에 축복받았다는 사실에 콧잔등이 시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