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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 3기입니다.[편집자말]
얼마 전, 책을 읽다가 '틈과 괴리'를 '톰과 제리'로 보고 혼자 배를 잡고 웃었다. 한편 이제 확실히 노안이 왔구나 싶어 씁쓸했다. 아이돌 그룹 뉴진스를 '누진세'로 들었다는 친구 말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오랜만에 신년회로 만난 친구들은 나빠진 건강검진 결과를 서로 다투어서 말하느라 음식이 식는 줄도 몰랐다.

신체적 노화를 경험할 때마다 중년이 된 내 나이를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나이 듦은 나만 겪는 것이 아니니,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인생 선배들의 조언을 들어보면 어떨까. 노인들의 세상을 유쾌하게 담은 책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이야기다.

웃픈 노인들의 이야기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책표지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책표지 ⓒ 포레스트북스
 
일본 사단법인 전국 유료 실버타운 협회에서 매년 주최하는 센류(川柳) 공모전 입선작 여든여덟 작품을 모았다. 센류는 5-7-5 형식의 짧은 시인데, 많이 알려진 하이쿠와는 다르게 풍자나 익살이 특색이다. 책 제목 역시 센류 입선작이다. 아마도 누군가를 보고 사랑을 느껴 가슴이 뛰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부정맥이라 갑자기 심장이 뛰었다는 사연이 '웃프다 (웃기면서 슬프다)'.
 
연상이 (としうえが​)
​내 취향인데 (タイプだけれど​)
​이젠 없어 (もういない)

 
 
평범한 연애 한탄처럼 보이지만 지은이가 92세인 것을 알게 되면, 웃음이 팡 터질 수밖에 없다. 무덤덤해 보이는 노년 세대 역시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존재구나 싶다.

달라진 부부 관계, 세대 차이, 세상 속도를 쫓아가는 어려움 등 다양한 상황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을 센류로 표현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신체 노화 특히 기억력 감퇴에 관한 내용이 가장 많다.

'일어섰다 용건을 까먹어서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거나, '찾던 물건 겨우 발견했는데 두고' 오기도 한다. 그러니 '만보기 숫자 절반 이상이 물건 찾기'일 수밖에.

80대 친정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어서 책에 등장하는 노년 세대의 일상이 낯익지만, 특히 친정어머니와 겹치는 작품이 있었다.
 
눈에는 모기를
귀에는 매미를
기르고 있다

 
 
작년 가을부터 어머니는 보청기를 끼기 시작했다. 보청기에 적응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사람 말소리뿐 아니라 소음도 덩달아 크게 들려서 주방 그릇 부딪치는 소리, 문 닫는 소리 등에 깜짝깜짝 놀란단다. 보청기가 돋보기에 걸려 빠지기도 하고, 고가라서 잃어버릴까 봐 신경 쓰인다며 불만이 많다.

하지만 귀에 사는 매미 소리를 뚫고 소리를 들으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보청기가 '인지 저하증(치매) 예방'이라고 설득할 뿐이다. 눈에 있는 모기야 벌써 10여 년 전부터 황반변성이 와서 최대한 관리를 하고 있지만 어머니의 시력은 점점 더 떨어지고 있다. 모기가 더 많아지기 전에 매미가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잘해 드려야지 다짐해 본다.

'남은 생' 아니라 '살아가는 시간'

친정어머니에게도 책을 권했다. 어머니는 동년배의 센류가 하나같이 재미있고, 공감됐다면서 이 센류를 최고로 뽑았다.
 
세 시간이나
기다렸다 들은 병명
"노환입니다."
 
그럴 만도 하다. 작년 12월, 친정어머니는 욕실에서 넘어져 압박 골절과 꼬리뼈 골절을 입었다. 성인은 보통 한 달이면 꼬리뼈가 잘 붙지만, 석 달 동안 집에서 일상생활만 하라는 주치의의 처방을 받았다. 이유는 '노환'이다. 머리가 아파도, 소화가 안 돼도 대부분 '노환' 때문이다. 오히려 큰 병이 아님을 감사해야 할까. 어머니는 동창회에 나가서 아프다는 말하고 싶으면 돈을 내야 한다며 웃었다.

재치 있는 '노년 센류'는 죽음에 가까이 있는 이들이 할 수 있는 농담이라 더 진솔하게 다가온다. '손주가 좋아하는 구급차를 보면 심란'하고, 바꿔 낀 'LED 전구를 다 쓸 때까지 수명이 남지 않았다'고 짐작한다. 하지만 삶에 대한 애착 또한 숨기지 않는다. '연명치료 필요 없다고 하고 매일 병원'에 다니고, '미련은 없다고 말해놓고 지진 나자 제일 먼저 줄행랑'친다. 어쩌면 집착이라기보다 자기 삶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노년은 삶의 결승선이 보이기 시작하는 나이다. 그렇기에 보이는 풍경도 다를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노년 세대가 자기들의 삶을 쓰고, 말하는 다양한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노년은 남은 생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편집 후기에 실린 입선자의 소감은 특별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상장을 받았어요. 공부로 1등 한 적도 없고, 운동회에서 1등 상을 받는 적도 없는데 센류로 칭찬받은 것은 지금까지 긴 인생 중에 최고로 영광스러운 일이에요. 상장은 소중히 여기다가 나중에 관에 넣고 싶어요."

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 3기입니다.
#사랑인줄알았는데부정맥#포레스트북스#노년#나이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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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세상의 나뭇가지를 물어와 글쓰기로 중년의 빈 둥지를 채워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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