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고물가 시대다. 하지만 난 여전히 운동을 배우고, 친구들과 해외여행도 가고, 작은 차도 한 대 산다. 남은 돈은 없고, 나의 작은 아지트를 지키기 위해 간신히 월세만 낼 뿐이다. 어른들이 보면 불경기에 어울리지 않는 과소비 20대 자취생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사치일까, 투자일까? 우리 청년들은 고물가 시대, 절약하면서도 스스로의 라이프스타일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치열한 중심잡기를 하고 있다.

방울토마토는 잠시 접어뒀지만
 
 서울레이스마라톤
서울레이스마라톤 ⓒ 정누리
 
기존에 다니던 헬스장과 PT를 관뒀다. 다이어트와 체력향상을 위해선 돈을 쓰는 것이 최고였다. 쓴 것이 아까워서라도 운동을 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비용이 부담됐다. 결국 그만뒀다. 하지만 돈이 아깝다고 다이어트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러닝을 시작했다. 신발 하나만 있으면 어디든 뛸 수 있다. 아낀 돈으로 마라톤을 등록해 의지를 산다. 체크포인트처럼 '한 달 뒤 마라톤이니까' 라는 생각으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간다.

기분 탓인지 주변에도 달리기를 시작한 친구들이 많아졌다. 뛰는 법을 잘 모르는 친구들은 러닝크루에 가입했다. 주말에 한 번씩 무료 강습을 하는데, 이곳에서 마라톤 경력이 긴 회원들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볼 수 있다. 당장 사람들과 뛰기는 부담스러웠던 나는 대신 런데이(Runday) 어플을 깔았다. 호흡법부터 달리기 속도까지 알아서 지정해주고, '런저씨'라고 하는 음성 코치가 달리는 와중에 응원까지 해준다. 잡담도 해주니, 최고의 가성비 운동 코치가 생긴 셈이다.

그러나 식단은? 농산물 값은 날로 높아져가는데, 아낄 수가 있나? 하지만 싸다고 라면만 먹을 수는 없는 일. 내 몸을 함부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최대한 요령을 부려야 한다. 우선 1kg당 1만4000원까지 오른 방울토마토는 잠시 접어둔다. 과일의 소비량도 줄이고, 상대적으로 오래 먹을 수 있는 오트밀이나 계란 미역죽을 이용한다. 양념 닭가슴살이나 단백질 파우더도 현재는 무리다. 뒷다리살이나 냉동 닭가슴살을 이용한다. 강아지 사료로 줄 정도로 퍽퍽한 닭가슴살은 전날 소금과 후추에 재워서 풀어놓는다. 금세 촉촉하고 부드러워진다.

회사에서는 틈만 나면 '유통기한 임박몰' 사이트를 들어간다. 유통기한이 한 달밖에 안 남은 무지방 요거트나 다이어트 간식을 꽤 저렴하게 판다. 소비기한이 짧으니 우선적으로 먹게 되고, 다른 것을 쳐다보지 않는다. 오히려 음식물 쓰레기는 줄어들고 몸은 더 부지런해졌다. 고물가 때문에 가벼워진 냉장고가 되려 나를 미니멀리스트로 만든다. 웃어야 할지, 슬퍼야 할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내게 나쁜 결과는 아니다. 

아끼는 것만 답? 나에게 맞는 '절약' 방법
 
 라오스
라오스 ⓒ 정누리
 
친구들과도 작년 여름 라오스를 갔다. 뉴스에선 항상 북적거리는 공항 인파를 꼬집는데, 빠듯한 지갑으로 해외여행을 간 것이 왠지 찔린다. 공교롭게도 당시 우린 셋 다 학생이라 돈이 넉넉지 않았다. 하지만 정보와 체력은 나름대로 있다. 어떻게든 효율적으로 여행을 다녀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쓴다. 수시로 올라오는 저가항공 동남아 특가딜을 잡고, 현지에서도 툭툭이라는 교통수단을 다른 관광객과 합승해 가격을 깎고, 같은 기념품이라면 어떤 마트가 싼 지도 발로 뛰며 체크한다.

며칠 동안 사서 고생하자, '굳이 이렇게까지 와야 했나?'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하지만 분명 내게 여행은 단순히 먹고 즐기는 것의 의미가 아니었다. 라오스는 내게 하나의 인풋(Input)이었다. 50, 60년대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재래식 주방의 아궁이, 함께 트럭을 탄 신혼부부 인도인 관광객의 에피소드, 한국인들을 보고 수줍은듯 도망가는 라오스의 학생들 등등. 보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바깥에는 잔뜩 있다. 나는 돌아와 이것을 여행기로 써 작은 원고료를 받았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 나는 고물가 시대에도 여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차도 마찬가지다. 주유비, 유지비, 세금까지 생각하면 이 시기에 차를 사는 것은 그야말로 바보다. 그러나 난 절약을 위해 무조건 대중교통만 타는 것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간과 체력도 아낄 수 있을 때 아껴야 한다. 발이 넓어야 인연이 하나라도 더 닿는다.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굴러만 가는 중고차 한 대를 과감히 산다.

과거 촬영 알바를 했던 공장 사장님에게 전화를 건다. 반갑게 받아주신다. 혹시 요즘은 일이 없냐고 묻는다. 차가 있어 예전처럼 다른 직원 분들이 카풀(Capool)해주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린다. 사장님 목소리가 흔쾌하다. 난 일을 하나 더 구했다. 고물가 시대, 20대인 내게 중요한 것은 절약보다 조금 더 무모한 투자였다.

어릴 적 <빈대가족 천원으로 살아남기>라는 만화책을 읽은 적이 있다. "돈을 절대 쓰지 않는다. 정말, 정말, 정말 필요하면 딱 천 원만 쓴다." 변기 물탱크에 벽돌 넣기, 빗물 받아서 빨래하기, 못 쓰는 옷 잘라 커튼 만들기. 기발하고 다양한 절약 방법들은 어린 내게 큰 감명을 불러일으켰다. 당장 집에 돌아가 다 쓴 페트병을 반으로 잘라 연필 꽂이를 만들었으니. '500원씩 아껴서 어른이 되면 궁전을 지어야지.' 그때를 생각해 보면 오늘의 모습이 참 다르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의 세상에 맞는 절약을 실천 중인 셈이다. 청년 세대들이 미래가 보이지 않아, 저축 대신 과소비를 한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면, 저축보다 더 확실한 투자로 전략을 바꾼 것은 아닐까. 때로는 쓰는 것이 아끼는 것보다 돈이 남는다. 어른들이 들으면 황당할 말이다. 허나 오늘의 행복 없이는 미래도 즐겁지 못하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안다. 우리는 지금도 조용히 나름의 방법대로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절약#마라톤#고물가#라오스#과소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반갑습니다. 정누리입니다. snflsnfl835@naver.com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