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여유만만(내 필명)님은 베일에 가려있어요."
얼마 전 글쓰기 모임에서 들은 말이 뜻밖이었다.
아, 베일에 가려있다니, 얼마나 신선한 말인가! '지천명(知天命)'이라는 50세를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라니, 공자님은 참 턱도 없는 말씀을 하시었다- 훌쩍 넘겼음에도 친구나 동료들에게 나는 투명하다, 순수하다, 솔직하다, 심지어 귀엽다는 소리까지 들어왔었다.
나에 대한 그런 평들에 대체로 '철이 없어 보인다는 말인가?' 싶다가도 '진실해 보인다'는 뜻이겠거니 좋게 해석하려 하기도 했다. 그런데 '베일'이라니!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나의 발견이었다.
업무상 글을 쓸 일이 많았다. 하지만 글을 더 잘 쓰고 싶기도 해서, 직장인 글쓰기 모임에 가입을 했다. 닉네임을 묻기에 짧은 고민을 해 보았다. '여유만만'이라는 단어가 불쑥 튀어나왔고, 그 지점에서 늘 애쓰며 살아가는 스스로를 위로해 주고 싶어서, 여유만만한 나를 되찾고 싶어서 글을 쓰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회가 거듭해 갈수록 '쓴다'라는 작업이 여유롭게 느껴지기는커녕 부담감으로만 다가왔다. 업무상 바쁜 시즌이어서 그렇겠거니, 갱년기라 힘이 달려서 그렇겠거니 하며 쉬운 구실을 찾아 숨으려 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비교적 여유로운 시즌을 보내면서도 '이 정도면 방종이야'라고 여겨질 만큼 글쓰기를 미루고 있는 모습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아마도 한심한 내 모습을 숨기려다 보니 글쓰기 모임에서 진솔한 나를 드러내지 못했던 것인가 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글쓰기를 이리도 미루고 또 미루는 것일까? 하고 싶다면서, 해야 한다면서 미루고 또 미루는 심보는 무엇인가? 원인은 '부담감'이었다. 왜 이리도 글을 쓰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가? 그 답은 '잘 쓰려고 하니까'이다. 잘한다는 말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춘기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아직 충분히 채워지지 못한 인정욕구가 보이고, 유능함으로 우월감을 맛보려는 어린 아이가 보인다.
자유롭기 위해, 행동하기 위해
이렇게 큰 부담감을 느끼면서 나는 왜 글 쓰는 걸 포기하지 못하는 걸까? 그건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게으른 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고, 타인은 물론 스스로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부담을 내려놓고 내 생각을 자유롭게 기록하고 그 속에서 깊고 느린 사유를 즐기고 싶다.
생각하기보다 행동으로 뛰어드는 나,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나의 기질상 깊이 사유하고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무척이나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는 일이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상상하고 연결하는 무한한 창조의 경험. 바로 그것이 내가 글을 쓰고 싶은 이유이다.
그럼 내가 창조하고 싶은 베일에 가려진 세계는 어떤 것일까? 그걸 알기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작업은 '지천명(知天命)' 즉, 내 목숨의 의미를 찾는 일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스승들의 책과 글 속에서 나를 찾아 헤매고 다녔다면, 이제는 멈추어 글을 쓰겠다.
아무도 읽지 않을 일기를 쓰듯이 나와의 깊은 대화를 시작해 보아야겠다. 그 속에서 투명한 나와의 만남을 통해 내 생명, 내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 내가 글을 쓰려는 이유이다.
탐욕, 무력함, 여림, 권태, 냉정함, 이기심, 아둔함, 분노... 그동안 포장해 온 가면들을 벗어던지고 이러한 내 안의 부정성을 직면해 보아야겠다. 그 부정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글로 새겨 보아야겠다. 글을 쓰는 작업은 천천히, 그리고 깊이 사유하는 기회를 애써 갖는 것이다. 느리게 생각하는 시간 속에서 나의 민낯을 순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다.
불편한 나 자신과 편안하고 깊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러한 나 또한 귀하게 다루어 볼 것이다. 그 속에서 내 존재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기뻐할 것이다.
흘려 넘기지 말아야 할 시간들을 기록하고 해석하여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찾고 싶다. 분노와 좌절감에 찌그러지거나, 불안과 두려움에 숨고 싶거나, 수치심과 슬픔으로 흔들리는 순간, 글로 새겨진 기억의 추를 꺼내어 들고 내 존재의 중심을 잡아 바로 서고 싶음이다.
흠결 없이 진실한 순간을 만나 오롯이 혼자서 내 안의 신성과 만나는 것, 그것이 글을 쓰고 싶은 진정한 이유이다. 하얀 백지, 아무것도 '없음' 위에 또박또박 한 글자씩 써 내려가는 '나'라는 존재의 창조, '나'라는 존재의 명료한 인식을 위해 나는 쓰고 싶은 것이다.
이로써 내 글쓰기의 목표를 수정한다. '잘 쓰는 나 되기'가 아니라 '진짜 나를 만나기'가 내 글쓰기의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