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끝날 때마다 출판계에서는 흔히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말로 그 해를 평가한다. 너무 자주 들어서 식상하긴 해도, 저 표현 자체는 맞는 말이다. 그리고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은 해마다 새롭게 갱신되고 있다.
동료 편집자들을 만나면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뭘 하는 걸까'에 대해 서로 자조 섞인 푸념을 털어놓기 일쑤다. 현 시대의 사회적 이슈와 트렌드를 고려해 아이템을 기획하고, 저자를 섭외하며, 원고를 검토해서 수정하는 등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책을 내지만, 그렇게 만든 책이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은 아닌지를 자주 고민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책 제목을 접한 순간, 관심이 갔다. 저자가 <경향신문> 인문교양
뉴스레터인 '인스피아'(링크) 발행인이라는 점도 흥미로웠다. 당장 나 자신이 '인스피아'의 애독자인 데다가, "책을 지팡이 삼는다"는 모토로 다양한 책을 다루는 뉴스레터를 발행하는 저자가 책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했다.
가장 믿을 만한 정보는 여전히 책에 있다
이 책은 인터넷에 수많은 텍스트가 범람하는 오늘날에도, 책만큼 가치 있는 텍스트는 흔치 않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책은 '믿을 수 있는 정보'를 담고 있다. 포털 사이트에서 키워드를 입력하는 것만으로도 수백수천 개의 관련 정보가 검색될 만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라곤 하지만, 정작 그 많은 정보 가운데 쓸만한 정보를 찾기는 쉽지 않다.
우선 그 정보를 작성한 사람이 전문성이 있는지는 고사하고, 누가 썼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대다수의 검색 결과는 위키피디아 등의 백과사전이나 전문가 인터뷰, 관련 서적, 언론 기사 등의 1차 정보를 복사하거나 짜깁기한 것인데, 그 과정에서 필요한 정보가 빠져서 오히려 원본보다 못할 때가 많다. 자극적인 표현과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글, 무의미한 광고성 글도 넘쳐난다.
반면 책은 "원산지가 표시된 정보"다. 자기 이름을 내건 저자가 정확성과 진실성에 일차적인 책임을 지고, 때로는 수십 쪽의 각주와 참고 문헌까지 대면서 근거를 제시한다.
저자뿐만 아니다. 편집자는 저자가 쓴 내용의 진위를 검증하고 논리를 가다듬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책이 다시 언론사와 서평가 등의 검증을 받는다. 그렇듯 '책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여러 구성원이 협력하고, 서로를 검증하면서 쌓아 올린 '믿을 수 있는 정보'의 총체가 책이다.
"좋은 글 한 편에는 저자를 비롯해 많은 이들의 헌신 어린 노력이 담겨 있다. 그런 헌신이 깃든 글은 오늘날 어디에 (많이) 모여 있는가?
이 물음에 나는 '책'이라고 답하고 싶다. 순식간에 무한에 가까운 정보를 뽑아낼 수 있다는 시대지만, 여전히 어떤 종류의 책은 더디게 출간된다. 책임감 있는 저자가 믿을 만한 정보를 엄선하고 자신이 일생 품어온 오랜 고민을 성실한 공부를 거쳐 글로 풀어내면, 편집자는 그것을 검증하고 읽기 좋게 교정한다. 그 외에도 수많은 노동이 켜켜이 더해진다."(18쪽)
인터넷 텍스트와 책 사이에 나타나는 이런 차이는 수익성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인터넷 텍스트를 제공하는 이들은 독자들에게 '양질의 읽기 경험'을 제공하는 것보다는 돈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수익을 위해선 오히려 신빙성이 없고 질이 낮아도, 자극적이고 무의식적으로 계속 다른 링크로 넘어가며 최대한 오래 떠돌게 하는 글을 올리는 편이 이득이다."(67쪽) 반면 책은 '가성비'가 떨어지더라도, 구태여 번거로운 '수고'를 들여서 독자들을 위해 양질의 텍스트를 만들려고 한다.
이 책은 정보의 신뢰성 측면 외에도 다양한 측면에서 책의 가치를 분석하는데, 이 또한 '수고'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가령 저자는 책을 "가치 있는 텍스트를 모은 방주"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정보를 저장하고 분류해서 필요할 때 찾아볼 수 있는 '접근 가능성' 면에서 책이 여타 매체보다 대체로 우월하다는 뜻이다.
일례로 책보다 유익한 유튜브 영상이나 블로그 글이 있어도 무수한 정보의 바다에서 그것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 콘텐츠가 삭제되지 않고 계속 남아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이 책이 인용한 어느 연구에 따르면, 인터넷 사이트의 평균 수명은 2년 7개월에 불과하다. 하지만 책은 다르다. '조류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도서관의 자연과학〉동물학〉조류 코너에 가는 것만으로도 해당 주제를 잘 정리한 콘텐츠를 접할 수 있다.
이 또한 수많은 사람의 '수고' 덕에 가능한 일이다. 무수한 책을 어떻게 하면 일관성 있으면서도 찾기 좋게 분류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 도서관학자와 문헌정보학자, 실제로 책을 구매해 분류 기호에 따라 배치하는 사서 등 도서관 관계자들의 '수고' 없이는 이런 시스템이 작동할 수 없다.
이처럼 책은 여러 사람의 '수고'를 통해 가치 있는 텍스트를 생산하고, 검증하고, 유통해 마침내 독자의 손에 닿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왔다. 그것이 바로 '지금도' 다른 매체가 넘보기 힘든 책의 가치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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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에겐 '자존감 지킴이' 같은 책, 하지만 언제까지 유효할까
출판 편집자로서 읽은 이 책은 '자존감 지킴이' 같은 느낌이다. 많은 이가 '책의 위기'를 말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책이 가치 있는 텍스트임을 설득력 있게 말해준다는 점이 그렇고, 출판계에 속한 사람이 '끼리끼리' 하는 자화자찬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나 역시 평균적으로 책이 여전히 다른 매체보다 '좋은 글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조금은 냉소적인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책 제목에서 '지금도'라는 말은 대체 언제까지 유효할 수 있을까? 머지않아 '아직은'으로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닐까?
1인 출판사 사이드웨이의 박성열 대표는 최근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와 한 인터뷰에서 "양질의 책을 내려면 한 권에 두세 달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사이클로는 생존할 수 없는 구조가 됐다"라고 말했다. 같은 인터뷰에서 역시 1인 출판사인 롤러코스터의 임경훈 대표도 "책의 수명이 짧아져서 구간 매출로 버티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이 책이 지적한 수익성의 논리는 인터넷에 범람하는 신뢰도 낮은 콘텐츠뿐만 아니라 책에도 적용되며, '수고'를 들여 한 권 한 권을 제대로 만드는 대신 '빨리빨리' 신간을 내야 하는 상황으로 변하고 있다는 의미다.
물론 이런 사정을 일반화할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출판사의 자본력 등에 따라 출판사마다도 상황이 다를 것이고, 미래에도 여전히 '수고'를 들여 좋은 책을 만들려고 하는 저자와 편집자들, 그리고 책 생태계의 구성원들은 분명 일정하게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출판 또한 산업이다. 업계의 위기가 장기화될 경우, 과연 책은 대체 언제까지 '좋은 글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남을 수 있을까? 특히 출판 분야는 전반적으로 자본 면에서 영세하다는 특징이 있다. <2021 출판산업 실태조사>는 "5인 미만 사업체가 전체 출판 사업체의 69.0%이며 5~9인 이하가 16.6%나 되는 등 10인 미만 사업체가 전체 출판 사업체의 85.6%에 해당하여 매우 영세한 구조를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내게는 책을 덮은 뒤에 이런 질문이 남았다. 저자가 말하는 책의 의미와 가치가 흘러간 옛이야기가 되지 않으려면, 책이 '한때 좋은 글들이 많이 모여 있던 곳'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쩌면 이 질문이 출판계 종사자나 소수의 성실한 독자 같은 "극소수의 '독서 은하계' 거주민"(9쪽)만의 질문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질문과 연결된 또 다른 질문, "지금 한국 사회에는 가치 있는 텍스트를 만들기 위한 '수고'를 지탱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가?"라는 질문은, 책에 별로 관심이 없는 이들과도 공유하고 싶다. 이 질문만큼은 '독서 은하계' 거주민을 넘어, 타인과 소통하고 연결되기를 바라며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