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라는 영화가 있다. 1995년 당시 한창 인기 있던 산드라 블록이 주연이다. 오직 컴퓨터로만 생활하던 주인공은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없다. 업무는 물론 피자를 시키는 것도 모두 온라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멕시코로 휴가를 갔다가 어떤 사건에 휘말리고 그녀를 증명해 줄 유일한 무기였던 네트에 그녀는 없다. 세상 어디에도 내가 나라는 정보가 존재하지 않음에 세상은 공포가 된다.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릴러 액션 드라마 네트.
몇 달 전 AI건조기를 사면서 처음 쿠O 앱을 깔았는데 이게 참 요물이다. 처음엔 굵직한 것만 주문했는데 어느새 자잘한 소모품까지 구입하다 보니 매일 택배가 배달되었다. 월 회비를 감수하며 회원 가입도 했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도 쇼핑을 하지 않으면 허전한 사람처럼 쇼핑앱을 열었다. 필요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필요할게 뭐 없나' 하는 마음에 수시로 둘러보는 수준이 되다 보니 하루에도 서너 개씩 택배가 도착했다.
도넛에 빵 쿠키까지. 먹거리도 신세계였다. 웬만한 생필품이 다음날이면 도착했다. 과소비로 즐기지 않던 간식도 쌓아두고 먹는 중인데 케첩 2660원짜리 무료배송을 클릭하면서 문득 영화 <네트>가 생각난 것이다. 단돈 몇 천 원이 무료배송이라니. 이러다 정말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없을 것만 같아 영화 같은 먼 미래를 상상하기도 했다. 동네 마트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손쉬운 쇼핑, 사라지는 마트... 편리한데 무서웠다
케첩 2660원은 마트 보다 저렴하다. 배송비도 없는 유통구조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최근 대형마트 3곳이 문을 닫았다. 편의점 4개도 폐업했다. 1년 전 근처에 식자재 마트가 생겨서 좋았는데 올 초 주인이 바뀐다며 재고 조사를 하는 바람에 2주간 영업을 하지 않았다. 그때 든 생각은 '문 닫으면 불편하니 제발 문 닫지 않았으면 좋겠다'였다.
그 후 영업을 재개했을 때 일부러 근처 식자재 마트를 이용했다. 그럼에도 마트에 가보면 사람들이 많지 않아 썰렁했다. 매장 물건은 텅 빈 곳이 많았고 시든 야채를 손질하고 있는 직원을 보기도 했다. 카운터는 자주 바뀌었고 여러 개의 계산대 중 이젠 한 대만 운용하고 있다.
가능한 오프라인 매장을 이용해야지 하면서도 온라인 쇼핑이 주는 편리함은 포기가 쉽지 않다. 빠른 배송에 가격도 착해 점점 마트를 이용하는 일이 없어졌다. 마트를 가지 않으면 나갈 일이 없던 나로서는 고립이었다. 편리한데 무서웠다. 1주일 동안 밖을 나가지 않아도 생활이 된다는 것이 놀라웠다.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은 상관이 없는데 사람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무인점포가 늘어나는 바람에 CCTV가 사람을 대신하는 걸 볼 때도 적응이 잘 안 됐는데. 모든 것이 점점 비대면 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 비약일진 몰라도 이러다 정말 영화처럼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해 나를 증명해야 하는 날이 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에 쥔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일상이 해결되는 시대는 분명 편리하다. 클릭만 하면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을 수 있고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세상은 점점 편리성을 추구하며 빠르게 변화해 간다. 편리성이 확장되면서 좋긴 한데 어쩐지 반가울 수만은 없는 기분이다. 지금 나처럼 방 한구석에 앉아 컴퓨터만 바라보는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섬찟해졌다. 굳이 <네트>가 아니어도 먼 미래는 그런 현실이 될 것만 같아 컴퓨터를 끄고 밖으로 나갔다.
딱히 살 것도 없으면서 5일장이 열리는 근처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올해 들어 처음 하는 시장구경이다.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댄다. 네트워크와는 다른 세상이다. 그 자리 그곳에 작년에 왔던 그 주인들이 그대로 자리 잡고 있다. 봄이란 계절답게 꽃 화분 묘목 장사가 제일 인기다.
꽃구경 하는 사람들 틈에 들어가 주인아저씨에게 작년에 산 '모나리자'가 월동을 못하고 죽었다고 했다. 물도 잘 줬다고 하자 옆에서 구경하던 노인이 끼어든다. "물만 주면 안 돼. 쌍화탕도 주고 소화제도 줘야지. 그래야 체하지 않아"라며 농담인지 진담인 듯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식물에 대한 정보를 주인 대신 한참이나 설명했다. 초면임에도 거림 낌이 없다. 재래시장은 이렇듯 주인도 손님도 모두 정겨운 이웃이 된다. 나이 탓일까. 나는 이런 느낌이 좋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나는 시장 가방을 들고 마트로 간다
세월의 나이만큼 손님도 주인도 모두 나이 든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 재래시장에서 늘 사던 그 자리 그 주인에게 양파 한 바구니를 샀다. 10개 2000원 하는 풀빵을 먹으며 길게 늘어진 시장길을 걷는다. 시장 입구에 80은 돼 보이는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나물 몇 가지를 놓고 파는 것도 여전하다.
시간이 흐르면 이 재래시장은 누가 지키고 있을까. 나 어릴 적 구경했던 시골 5일장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이 재래시장을 지키고 있는 노인들이 고마웠다. 편리함에 언택트 온라인 시대가 빠르게 지배한다 해도 지금 이 상인들이 웃으며 시장을 지킬 수 있는 날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오래도록.
사람을 대면하지 않는 온기 없는 세상은 비극에 가깝다. 사람 공기를 마시며 온기를 느끼는 이 시간이 언젠가 눈물 나게 그리워지는 그날을 서둘러 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게는 아직 아날로그 감성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쇼핑앱 회원 탈퇴를 하고 앱을 삭제했다. 언제 또다시 앱을 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나는 시장 가방을 들고 근처 마트로 향한다. 산책하던 이웃을 만나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햇살을 받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 좋다. 그리고, 계절을 피부 깊숙이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서 정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