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연극으로 데뷔해 영화와 연극, 드라마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배우 김지성의 사는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
초등학교를 마주 보며 한적하게 자리 잡은 동네 카페가 있다. 카페와의 첫 인연은 1년 전 여름, 억수 같은 장대비를 피해 들어갔을 때였다. 소박하게 마련된 네 개의 테이블 중에 창가자리로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사장 할머님께서 그치지 않는 폭우에 커피가 식어가도 편하게 머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카페가 들어서기 이전 상점들은 연이어 폐업을 하고, 심지어 코로나로 주변 가게들까지 문을 닫았는데도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거뜬했던 곳이라 신기하게 여긴 적이 있었다.
그날 할머님과의 상견례 이후, 이따금 카페에 머무르는 일상을 갖게 되었다. 처음엔 카페 앞을 지나치며 잠시 목을 축이는 반려견들에게 시선이 갔는데, 점차 담소를 나누는 이웃 주민들의 모습이 차례로 눈에 담겼다.
아파트 단지 안의 길고양이들에게 중성화 수술뿐 아니라 매일 사료와 물까지 마련해 주는 샤샤(반려묘) 엄마는, 콩알이(길냥이)의 눈에서 고름을 발견하자마자 급히 병원으로 데려갔다. 조금만 늦었어도 뇌까지 전이되어 생명이 위험했을 거란 의사소견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쪽 눈의 적출수술 비용을 지불했다.
미담을 전해 들은 카페 단골 이웃들이 십시일반 병원비를 모아 샤샤 엄마를 도왔다. 얘기를 안 들었으면 모를까, 들은 이상 엄마와 나도 뒤따라 동참했다. 화단 구석구석에 사료를 나눠주고 오는 샤샤 엄마와 마주칠 때마다 나는 남몰래 속삭이곤 한다. '천사를 만났다!'고.
카페에서 우연히 알게 된 '천사', 그 감춰진 이야기
순순이(반려견) 엄마의 친정어머니는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남매를 키우셨단다. 외국 출장이 잦은 딸 부부의 살림과 손주를 장성히 키워내셨는데, 그러다 노년을 맞아 어느날 치매가 왔고 결국 집 근처 요양원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고. 일주일에 두 번, 요일을 일부러 정해놓고 친정어머니를 보러 가는 이유는 불쑥 방문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당일, 신선한 과일을 구입해 간병인과 근무자들께 나눠주고 가끔 회식비도 챙겨준다. 그럼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어머니의 목욕을 시켜줄 거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바람대로 늘 정갈한 모습을 마주하며 감사한 마음을 새긴다.
지그시 어머니에게 눈을 맞추고 당신 딸이라 나지막이 말해본다. 그러면 이내 돌아오는 어머니의 답변.
"아니야, 우리 딸은 예쁜데."
"그럼 난 누구야?"
"좋은 사람."
어머니는 그렇게 답하며 딸의 머리를 곱게 쓰다듬어 주신다고 했다. 순순이 엄마를 통해 말보다 고운 선행을 배운다.
소망이(반려견)가 할아버지와 함께 목을 축이러 카페 앞을 들를 때면 유독 반기는 주민들의 목소리가 넘쳐난다. 소망이는 새끼 때부터 동네 편의점 앞의 짧은 줄에 묶여 수년동안 사계절을 묵묵히 버텨왔던 녀석이다.
폭염이 계속되던 어느 날, 할아버지네 가족이 편의점 주인에게 양해를 구한 후, 집에 데려가 에어컨 바람 아래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해 주었고... 고민 끝에 결국은 소망이를 가족으로 맞아들였다.
이제 잔병치레도 사라져서 어디로든 산책을 다니는 소망이의 흰 털은 윤기마저 좔좔 흐른다. 잔망스러운 행동 없이 사장 할머님을 의젓하게 바라보는 녀석의 눈은 사람보다도 깊고 의젓하다. 소망이의 견생역전을 진심으로 축복한다.
저절로 발걸음이 향하는 카페의 비결
카페에 저절로 발걸음이 옮겨지는 비결은 뭘까. 그 중심에는 동네 반려견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사장 할머님이 있다. 서로 앞다투어 할머님의 볼을 핥아주며 눈을 맞추려 줄을 선다. 산책을 마친 반려견이 카페로 전력질주하면 사장 할머님이 가게 문을 활짝 열고 나와 반겨주신다.
녀석 또한 '꼬리콥터'로 답례한다. 휴무인 일요일까지 가게 앞을 서성이며 할머님의 부재를 확인한 후에라야 아쉽게 발길을 돌릴 정도이다. 할머님과 통성명을 한 반려견들의 대부분 비슷한 행동이다.
카페를 그냥 지나치더라도 멀리서 손을 크게 흔들어 주고, 한겨울에 반려견과 산책 후 얼어버린 두 손도 꼭 잡아 녹여주신다. 또 이웃 주민들에겐 친구 집으로 차 마시러 가듯 편안하게 곁을 내주신다.
할머님은 때론 자신에게 치매가 올까 미리부터 걱정하지만, 그 얘길 듣는 주민들은 다들 근심부터 덜어드린다. 할머님을 좋아하는 수십 마리의 개 이름을 일일이 외우는 것만 보더라도 그럴 염려 없으니, 걱정 붙들어 놓으라고 말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포근하게 품어주시는 사장 할머님의 입가엔 미소가 항상 떠나질 않는다.
화기애애한 엄마들의 대화 사이로 살포시 문을 열고 들어온 복순이네 아들이 음료수를 주문한 후, 책가방을 내리고 영어 참고서를 편다. 바닥에 발이 채 닿지도 않던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혼자 온 이후로, 올해 고등학생이 되었다며 가장 오래된 '찐 단골'이라 했다.
사장 할머님이 6년 동안 떡도 주고, 빵도 주며 보살피니 어느 저녁 무렵인가, 점퍼 가슴속에 식지 않게끔 붕어빵을 품어와 수줍게 꺼내더란다. 그와 마주친 어느날, 또래 친구도 없는 카페에 왜 자주 오는지 그 이유를 조심스레 물어보니 그는 씩 웃으며 "편해서요"라고 답해줬다. 그 이상은 캐묻지 않았다. 느끼는 건 다 같지 아니한가.
이곳은 공간이 다소 협소한 관계로 지인과 긴밀한 사담을 즐기기는 어렵다. 통상적인 카페처럼 약속에 의해 아무개를 만나거나 주변인들과도 별 인연 없이 스쳐 지나가는 곳이 아닌, 안 보이면 근황을 궁금해하고 모습을 보이면 크게 반색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제는 순순이 엄마가, 오늘은 사장 할머님께서 내 앞에 스스럼없이 동석하기도 한다. 빈 손으로 오는 법도 드물다. 무 하나라도 깨끗이 씻어와 사장 할머님께 드시라며 툭 내민다. 서로 사는 형편에 대한 편견도 없고 음식도 나눠먹으며 서로의 인생을 공유하는 이곳은, 반려견들과 동네 이웃들의 사랑방이다.
복잡한 삶 속에서 잠시 마음의 정화도 얻고 소소한 선행도 닮아가며 점점 이웃으로 붉게 물들어가는 곳, 36.5°C의 체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커피향보다 사람 냄새가 더 진한 카페. 나는 요즘 '동네 카페의 참맛'을 제대로 만끽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