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 학교는 일반계 고등학교(예전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리키는 말로 한정하고자 한다. 30년 넘게 교직에 있다가 퇴직했지만 일반계 고등학교가 아닌 곳에 근무한 적이 없어서이다.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가르치기'이다. 여기에 '평가하기'와 '기록하기'를 더하면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 삼종 세트가 완성된다. 학교에서는 수업을 통해 가르치고 시험을 통해 평가하고 학생들의 교육 활동을 관찰하여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한다. 가르치고 평가하고 기록하는 것이 학교의 가장 핵심적인 활동이다.
그렇다면 학교에서는 이 중요한 활동들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우리나라 모든 학교의 실상을 알지 못하니 내가 근무했던 일반계 고등학교의 양상을 통해 살펴보겠다.
맨 먼저 '가르치기'. 내가 근무했던 고등학교에서의 가르치기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교사가 수업의 중심이 되어 학생들에게 일제식으로 설명하기'라고 할 수 있다. 교직에 첫발을 들인 때인 1989년과 퇴직할 때인 2023년의 수업 풍경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물론 수업 활동에서의 학생 활동이 꾸준히 강조되면서 수업 풍경에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1970년 후반의 수업 풍경과 비교해서 생각해 보아도 압도적으로 달라졌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런 형태의 수업으로는 학생들의 창발성을 이끌어 낼 수 없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교사의 설명을 수동적으로 들으며 교사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부분을 적고 있기 때문이다. 교사 중심의 수업에서 학생 중심의 수업으로의 혁명적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일부 교사들이 그런 형태의 수업을 시도하고는 있다. 하지만 내가 근무했던 학교의 경우 그 시도는 찻잔 속에서 이는 바람 수준에도 못 미쳤다.
학생 중심 수업이 그 누구도 비켜 갈 수 없는 거대하고 도도한 흐름이 되도록 해야 한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teacher)'가 아니라 '조정자(coordinator)'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이런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학교가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근무했던 학교에서는 이에 관한 학교 차원의 그 어떤 논의도 없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일반계 고등학교가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진학 실적에만 매몰되어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할 생각이 전혀 없다. 우리나라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세계의 첨단을 달리고 있다는데, 고등학교 교육에서는 여전히 전근대의 외피를 쓰고 있는 듯해서 씁쓸하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외피를 한꺼번에 확 벗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평가하기'는 '가르치기' 못지않게 중요한 교육 활동이다. 평가를 잘해야 제대로 가르쳤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현행 우리나라 고등학교의 평가에는 '지필 평가'와 '수행 평가'가 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와 같은 일제식 평가가 지필 평가에 속하는데, 주로 오지선다형으로 평가한다. 수행 평가는 학기 중 수시로 이루어지는 평가인데, 주로 서술형이나 논술형으로 평가한다.
수행 평가를 제대로 하면 학생들의 창발성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제대로 된 수행 평가를 하기란 매우 어렵다. 서술형이나 논술형으로 평가하다 보니, 오지선다형 평가에 비해 채점자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교사들에게는 '공정성'에 대한 압박이 상존한다. 그래서 대개 수행 평가 점수의 급간을 줄이고 웬만하면 만점을 주어 공정성 시비에서 벗어나려 한다. 학생들도 웬만큼만 하면 수행 평가에서 점수가 깎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런 형편이다 보니, 현재 우리나라 일반계 고등학교의 평가 체계에서는 오지선다형의 지필 평가가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학생들도 지필 평가가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내신 성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에 지필 평가 3~4주 전부터 시험 준비에 다 걸기 하는 학생들이 아주 많다.
오지선다형의 지필 평가로 학생들의 실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대개 범위가 정해져 있는 시험이므로 범위 내의 핵심 사항을 잘 요약해서 암기하면 좋은 성적을 거둘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 지필 평가는 사교육을 통해 얼마든지 대비가 가능하다. 지필 평가에 대비하기 위해 학원으로 몰려가는 무수히 많은 학생들을 교직 생활 내내 보았다.
제대로 된 평가를 통해 일반계 고등학교 교육이 제자리를 잡게 하려면, 오지선다형 지필 평가를 없애고 오로지 수행 평가만으로 학생들을 평가해야 한다. 그러려면 참으로 많은 것들이 변해야 한다. 준비해야 할 일도 어마어마하게 많을 터이다. 그렇지만 차근차근 준비하여 지금부터 한 발 한 발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가르치기'와 '평가하기'가 끝나면 이제 '기록하기'의 장으로 넘어가야 한다. 요즈음은 학교생활기록부의 여러 항목 중에서 '과목별 세부 능력 및 특기사항' 항목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 각 과목 교사들이, 학생들의 수업 중 활동을 관찰하고 평가하여 적는 항목이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 학생부종합 전형에서도 매우 중요한 전형 요소로 작동한다. 가히 학교생활기록부 '기록하기'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교사들이 습관적으로 또는 별생각 없이 경우에 따라서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으로 과목별 세부 능력 및 특기사항(과세특)의 기록을 과장하는 데 문제가 있다. 교사가 수업 중 관찰한 사실을 바탕으로 교사의 평가를 덧붙여 기록하면, 과세특 기록은 그것으로 끝이다. 그 이상은 없고, 아니 없어야 한다.
하지만 내 경험상 교사들은 흔히 과장해서 과세특을 기록한다. 과세특을 쓰고 난 뒤 "우리 모두는 위대한 소설가다"라고 외친, 후배 교사의 말이 그것을 웅변한다. 또 다른 교사는, 자신의 수업을 들은 모든 학생의 과세특 기록을 제한 글자 수인 500자까지 꽉꽉 채우느라고 너무 힘들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수업 중 관찰한 사실을 바탕으로 과세특을 썼다면 모든 학생들의 과세특을 꽉꽉 채울 수는 없었을 터이다. 후배 교사의 말대로 소설을 좀 썼다고 해야 하리라.
아마 자신이 가르친 학생이 대학 입시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았으면 하는 심리가 작동하여 그렇게 과장을 했으리라 짐작한다. 문제는 그러한 심리 기제를 가지고 과세특을 쓰는 행위를 방지할 대책이 학교 현장에 아예 없다는 점이다.
관찰한 사실에 바탕하여 기록하라는 말은 해마다 교사들에게 나누어 주는 '학교생활기록부 기재 요령'이라는 책자에, 글자로만 존재할 뿐이다. 학교 현장에서는 그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생활기록부 담당 교사도, 담당 부장 교사도, 교감도, 교장도 그 누구도 하지 않는다.
각 과목 담당 교사가 자기 과목의 과세특을 기록하면 그것으로 거의 만사형통이다. 학생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물론 겉으로는 매우 그럴듯한 결재 체계가 있다. 생활기록부 담당 교사, 담당 부장 교사, 교감, 교장으로 이어지는 꽤 엄정한 체계가 있어 보인다. 또 생활기록부 점검 계획이라는 거창한 계획을 수립한다, 그러나 내실이 없다. 주로 생활기록부 기재 요령 위반 여부와 오탈자 여부 정도를 점검하기 때문이다.
과세특을 제대로 기록하려면, 반드시 내실 있는 점검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과세특에 기록한 내용이 수업 계획 및 평가 계획과 상응하는지를 검토하면 된다. 그러면 자연히 수업 계획과 평가 계획의 질도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다.
과세특 기록 내용을 점검할 때는 이미 모든 학교에 설치되어 있는 교과협의회와 학업성적관리위원회를 활용하면 된다. 각 교과협의회에서 그 교과에 속한 모든 과목의 과세특 내용을 1차적으로 점검한 다음 학업성적관리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과세특 내용의 충실도는 놀라울 정도로 좋아질 것이다.
고등학교 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해 지금 당장 바꾸어야 할 세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간단하게 한 줄로 줄이면 이렇다.
수업은 학생 중심 수업으로, 평가는 수행 평가만으로, 생활기록부 기록은 과장하지 말고.
말하기는 쉽지만 행하기는 어렵다. 환골탈태, 학교의 근간을 바꾸어야 하는 일이다. 뼈를 깎는 아픔이 수반되는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반드시 시작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육계 그 어디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구태의연한 학교의 모습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