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다니던 회사의 폐업을 핑계 삼아 보름간 거제를 여행했다.
육지에 사는 이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게다가 몽돌해변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 둥그런 몽돌들이 파도에 밀려 데구르르 차르르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보다도 '보름살기'는 당일치기나 1박 2일 같은 짧은 여행과는 조금 달랐다. 저녁이면 동네 농협에 가서 싱싱한 미역줄기며 굴 같은 해산물을 사다가 밥을 하고, 밥을 먹은 후에는 슬리퍼를 쓱 신고 나가서 몽돌소리를 들으며 산책을 할 수 있었다.
거제의 아름다운 여행지들을 마주했을 때의 감동도 컸지만, 그 아름다운 지역에 조금이나마 스며드는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현지인과 여행객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지점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보름동안이나 여행 했지만, 아직 가보지 못한 곳들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거제를 찾았다.
거제로 떠난 봄 여행... 떨어지지 말아라, 떨어지지 말아라
여행을 앞두고 떨어지지 않기를 빌었다. 벚꽃들이 말이다. 거제로 봄여행을 떠난 터라 벚꽃도, 바다도 보고 싶은 욕심이었다.
한순간에 떨어지는 게 벚꽃인지라 마음속으로는 내심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다행히도 그렇지 않았다.
4월 6일 여행 첫 날. 점점 더 거제에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남쪽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분홍빛이 더 환하게 번져갔다. 국내 최대 벚꽃 축제하면 진해 군항제가 아닐까 싶은데, 진해뿐만이 아니라 그 근방 곳곳의 가로수가 온통 만개한 벚꽃이었다. 국내 어디를 가도 예쁠 봄이지만, "따뜻한 남쪽 나라는 다르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그 풍경은 거제에서도 이어졌다. 거제에 들어서자마자 눈부시게 화사한 벚꽃이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특정 벚꽃 명소가 아니라 차들이 다니는 도로 옆 가로수가 그토록 화사했다.
덕분에 사는 곳에서 거제로 이동하기까지 꽤 장거리여서 피곤할 법했는데, 오는 길 내내 창밖 풍경이 예뻐서 몸의 피곤과는 별개로 기분이 벚꽃색을 따라 물들었다.
그렇게 한 3일 정도는 원 없이 벚꽃을 본 것 같다. 장승포 해안도로에서 능포양지암조각공원에 이르는 길은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벚꽃 명소였고, 고현천에서 독봉산웰빙공원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에도 그야말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하지만 굳이 이런 벚꽃 명소가 아니더라도 길을 걷다 보면,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게 벚꽃이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학동고개 벚꽃길
특히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학동고개 벚꽃길이다.
파노라마케이블카 타는 곳에서 학동 몽돌 해수욕장으로 향하는 길, 구불구불한 고갯길이 꽤 이어졌다. 그 고갯길 양쪽 가로수가 모두 벚꽃이었다.
천천히 길을 따라가자, 어느새 분홍빛 벚꽃 터널 속에 들어와 있었다.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감탄사만 연신 나오는 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벚꽃 드라이브 하기 좋은 더없이 낭만적인 길이었다.
좀 더 오래 머무르고 싶은 곳이었지만, 차가 오가는 곳인지라 드라이브로만 벚꽃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쉬운 만큼 차창 밖 풍경은 더 아름다웠다.
게다가 벚꽃길이 일직선이었다면 예쁘긴 하지만 재미는 덜했을 텐데, 구불구불한 길이어서 더 매력적이었다.
알고 보니 학동고개 벚꽃길은 출사 장소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드라이브를 하던 도중 우연히 고갯길 근처 언덕 위, 사진작가로 보이는 이들이 카메라를 든 채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어떤 사진을 찍는 걸까 궁금해 찾아봤더니, 언덕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고갯길의 모습은 그야말로 '작품'이었다.
해질 무렵 학동고개를 오가는 자동차 불빛의 궤적을 장노출로 찍은 사진은 선명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 곡선을 말발굽 궤적이라고도 하고 한반도 지형 궤적이라고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 곡선으로 이루어진 궤적과 벚꽃이 한데 어우러지는 풍경을 담기 위해 많은 사진작가들이 찾는 듯 했다.
그러고 보니 거제는 직선보단 곡선이 많았다. 동글동글 몽돌이 그랬고, 어느 산에 폭 감싸인 작은 바닷가 마을의 해안선도 그랬다. 거제 속의 또 다른 섬, 칠천도나 산달도를 두르는 해안도로도 그랬다.
해안도로라고 하니 생각났다. 거제에는 벚꽃만 피는 게 아니었다. 해안 도로 드라이브를 하다 우연히 만난 아담한 유채꽃밭만 여러 곳이었다. 거제의 유명한 관광지인 신선대에도 바다의 푸르름에 노랑 빛깔이 더해져 있었다.
그뿐이랴. 지심도 동백꽃, 공곶이 수선화, 능포양지암조각공원과 독봉산웰빙공원의 튤립, 대금산 진달래, 갖가지 꽃이 피어있는 거제도 농업기술원 등 굳이 딱 어디라고 할 것도 없이, 봄이면 그야말로 거제 전체가 꽃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과거 에티오피아의 어느 황제가 거제를 방문한 뒤 숲, 바다, 섬이 한데 어우러진 이곳의 뛰어난 자연 경관에 감탄해 원더풀을 7번이나 외쳤다고 한다. 하지만 자연 경관에 벚꽃이 더해진 봄날의 모습을 봤다면, 아마도 7번으로는 모자라지 않았을까.
봄에 찾은 거제는 곳곳이 꽃이었다. 여름이 아니라 봄에 찾아도 좋을 곳이 거제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꽃구경에 더해 바다야 봄여름가을겨울 언제든 그 자리에 있어주니 더 좋고. 더욱이 봄바다는 여름만큼 사람들이 붐비지 않아 조용한 해변에서 차르르 몽돌소리를 온전히 듣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다.
그 사실을 이미 아는 걸까. 봄날, 한적한 몽돌 해변 위, 어느 커플이 단둘이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순간 저버리는 게 벚꽃이고 그래서 아차 하면 놓쳐 버리는 게 벚꽃인데, 올해는 그 꽃을 이곳에서 맘껏 볼 수 있어 좋았다.
물론 언제 그랬냐는 듯 벚꽃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내 추억 속에는 그대로 남아 있다. 아직도 선명한, 푸르른 바다에 더해진 그 화사한 분홍빛들로.
덧붙이는 글 | 위 글은 글쓴이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tick11)에도 함께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