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같은 현대인들은 경쟁사회를 살아간다고 바쁘다. 어디로 달려가는지도 모르게 가열하게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번아웃이 찾아오기도 하고 그 결과 우울해지기도 한다. 우울은 보통 부정적 정서로 여겨지며 피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나는 오늘 좀 다른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는 우울함을 예찬한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 보면 나오는 캐릭터 중 조이(joy)가 있고 새드(sad)가 있다. 조이는 항상 밝고 새드는 무기력하고 우울하다. 새드는 자신이 있으면 안 되는 존재처럼 인식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기쁨은 좋지만 슬픔은 당혹스럽고 잘 다루지 못한다. 하지만 슬픔(우울)이 인간을 인간 되게 만든다.
우울의 장점, 진실을 보게하는 것
왜냐고? 우울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다. 또는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우울의 장점을 생각해 본다. 우울은 사람을 느리게 하고 멈추게 한다. 침잠하고 반추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 진실을 보게 만들고 무엇이 진짜 중요한 것인지 묻게 한다.
나도 아직 우울과 친하지는 않다. 여전히 우울이 싫다. 그냥 밝고 활기찼으면 좋겠다. 그래도 우울은 마음속에서 빼꼼 고개를 들이밀며 자신을 봐달라고 말한다. 나에게, 너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외로운 사람이자 직업 상담가이다. 이런 상황적 한계 때문에 때로는 내가 상담을 해도 되는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할 때도 있다. 좀 더 행복한 사람이 상담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물론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상담을 위한 준비를 여러모로 갖추었지만, 때때로 존재론적 질문에 부딪히는 면이 있다.
감정적으로는 다소 다운되었지만 존재는 평온해졌다. 어쩌면 무조건 달릴 때가 아니라, 자신에게 더 묻고 나의 존재와 더 친해지며 걸을 때라는 것을 나의 우울이 말해주고 있다. 여전히 부족해서 타인에게 실수하고 의존적인 면도 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우선 따뜻한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
나에게 강함만이 아닌, 약함의 위로가 함께하길 이 글을 쓰면서 소망한다. 요즘의 사회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 같다.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열심히 배운 가치는 연대와 공존인데 지금의 사회는 너무 엄혹하다. 실제로 배도 고프고 정서도 주리다.
나는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살고 싶지 않았던 시절을 거쳐 살아있어 다행이란 순간도 지났다. 지금은 살고 있으니 살아지는 삶을 살고 있다. 벅찬 환희에 찬 승리자는 아니지만, 다소간의 우울과 쓸쓸함, 결핍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승자만이 살아남는 것 같은 세상에서 조금 다른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상담사가 되고 싶다.
침잠하고 들여다보고 걷는 그 시간 동안 내게 양적 팽창이 아닌, 질적 성장을 기대한다. 밀가루 반죽에 이스트가 들어가서 빵이 부풀어 오른다. 나라는 반죽에 우울이라는 이스트가 들어가 깊이 있는 존재라는 빵이 되길 원한다.
바쁘게 살아가는 어느 날, 문득 우울해졌다면 생각해 보자! 지금이 멈추어 서서 달려가야 할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고, 나 자신을 추스를 좋은 기회란 사실을. 우울은 낯선 감정이지만 우리의 존재를 깊이 있게 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우울은 반드시 내쫓아야 할 적이 아니라, 잘 껴안고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의 이웃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저의 블로그에 중복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