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아침 첫 시간, 나는 우리 반 아이들과 늘 주말에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시작하는데 그날의 주제는 바로, 주말에 겪은 아찔한 이야기였다. 나는 토요일에 있었던 가슴 철렁한 이야기를 아이들 앞에서 꺼내놓았다.
이틀 전, 그러니까 지난 토요일, 첫째 아이를 데리고 아이의 유치원 시절 단짝친구 가족과 고깃집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두 달여 만에 만남인지라 아이는 가는 내내 들뜬 표정으로 시종일관 재잘대며 신나 했다. 도착 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끈 뒤 짐을 주섬주섬 챙기던 찰나. 갑자기 뒷좌석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좁은 차 안을 울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뒤돌아 보니, 사색이 된 아이의 얼굴과 함께 옆 차량에서 내리는 한 아주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차에서 내린 아주머니와 남편은 자기들 차량을 이리저리 살피는 중이었고, 그제야 상황파악을 한 나는 달아오른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아주머니는 내게 "얼마나 세게 문을 열었는지 차 안이 울리더라고요. 산 지 얼마 안 된 외제차인데.. 여기 보면 살짝 충격이 있네요"라며 차 뒷좌석 문을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셨다. 나는 거듭 머리 숙여 사과를 하며, 차 안에 탄 아들을 향해 그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엄마가 늘 말하잖아. 내리라고 하기 전엔 내리지 말라고."
아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볼이 발갛게 상기된 채로 내 얼굴만 쳐다보았다.
아주머니께 전화번호를 알려드리고, 많이 속상하셨겠다며 연거푸 사과의 말을 전한 뒤 정비소에 가보시고 연락 달라고 정중히 말씀드렸다. 그 말을 들은 차주인 부부는 차로 돌아갔고 나는 그렇게 유유히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검은색 지프차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차가 주차장을 완전히 빠져나간 뒤 나는 맥이 풀려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순간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떠다녔다. 작년에도 사고가 있어 보험처리를 했던 경험이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보험료가 함께 묶여 수년째 무사고인 남편이 나를 향해 던질 날카로운 시선이 먼저 떠올랐고, 수리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내 가슴을 강하게 압박해 왔다.
약속이고 뭐고 당장 차를 집으로 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솟구치는 화를 겨우 억누르며 눈으로는 뒷좌석에 앉은 아이에게 내내 원망의 눈길을 쏘아대고, 입으로는 나오지 말걸 그랬다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뒤에서 내내 숨죽이며 내 반응을 살피던 아들의 표정이 일순 밝아지는 것이 룸미러를 통해 보였다. 어느새 지인의 차량이 아까 지프차량이 빠져나간 내 차 옆 주차공간에 주차를 하려고 들어오고 있었다.
엄마 속은 아는지 모르는지
두 달여 만에 만난 아들의 친구는 들뜬 표정으로 아들에게 다가왔고 둘은 주차장이 떠나갈세라 서로 꺅꺅 소리를 내며 반가워했다.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내 속은 아는지 모르는지 서로만이 알고 있는 암호를 잔뜩 늘어놓으며 둘은 손을 잡고 나란히 고깃집으로 올라갔다. 들어가자마자 아이들은 놀이방으로 신나게 뛰어갔고 우리는 테이블에 오랜만에 마주 앉았다.
아이친구엄마이자 나의 단짝 동네언니는 그런 복잡한 내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나는 방금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언니는 삼겹살을 열심히 구우며 금세 아련한 눈빛을 장착한 채 자신도 두 달여 전 아들이 문을 세게 열어 옆의 벤츠차량에 '문콕'을 해서 150만 원을 물어낸 이야기를 전하며 답답한 내 마음을 온전히 공감해 주었다. 그 순간 콱 막혔던 속이 일순 뚫리며 그제야 삼겹살 한 점을 겨우 씹어 삼킬 수 있었다.
나의 답답한 속도 모르고 해맑게 놀이방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보며 "쟤는 걱정도 안 되나 봐. 엄마는 속이 이리도 타는데"라는 심정으로 두 시간을 보냈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아이친구의 간곡한 부탁에 차를 타고 이사오기 전 아파트 놀이터로 향했다. 아이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유치원 시절 내내 뛰놀던 놀이터를 향해 소리치며 뛰어갔고 그곳에서 한 달 넘게 초등학교 입학적응 스트레스를 단숨에 날리듯 신나게 놀아댔다.
물총싸움을 하며 흠뻑 젖기도 하고 또래 아이들과 소리 지르며 뛰어노는 아이의 표정은 그야말로 무장해제상태. 그런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저런 렇게 신나고 천진한 웃음을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나 곰곰 떠올려보게 되었다.
그 표정을 보며 그제야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아까 계속 아이를 향해 원망의 시선을 보내고 잔소리한 것이 못내 후회되기 시작했다. 아이도 너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흥분해서 평소와 달리 과한 행동이 나왔을 텐데. 그 사달이 날 줄 꿈에도 몰랐을 텐데, 라며.
"엄마, 우리 감옥 가야해?"
사위가 어둑해지자 아이들은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갔고, 흠뻑 젖은 아이가 감기가 걸릴까 걱정된 동네언니가 아이를 자신의 집에서 옷을 챙겨 나와 갈아입혀주었다. 두 아이는 서로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선 아이는 조용히 차에 올랐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미소 가득 머금은 얼굴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드리워져있었다.
조용히 운전대를 잡은 내게 뒷좌석의 아이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엄마 우리 감옥가? 돈 많이 물어내야 해? 돈 못 내서 경찰이 잡아가면 어떡해?"
아이는 자신의 가슴속 꾹꾹 눌러놓은 걱정들을 줄줄이 꺼내놓기 시작했다. 아까의 일은 까맣게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런 말들을 듣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나는 아까 언니에게 답답한 심경을 털어놓으며 속이 조금 편해졌는데 아들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속이 얼마나 탔을까, 얼마나 두렵고 초조했을까'라고.
그런 마음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고 작은 마음속에 꾹꾹 눌러두고 아팠을 생각을 하니 마음 한 구석이 저려왔다. 그리고 아까 아들을 책망한 나 자신이 후회되었다. 아들의 걱정 어린 표정을 룸미러로 더듬어보며 차분하게 답했다.
"우리 감옥 안 가, 엄마가 열심히 일해서 수리비 내면 되니까 걱정 마. 그리고 00 이도 그럴 줄 모르고 그런 건데 많이 놀라고 속상했지?"
마음을 알아주는 내 말에 아이는 비로소 표정이 살짝 풀어지며 끄덕였다. 그리곤 충고를 덧붙이니 고개를 더욱 세차게 끄덕인다.
"그리고 오늘 알았지? 차가 도착하면 엄마가 내리라고 하기 전에 절대 문 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앞으로 안 하면 되는 거야."
마음을 이해받아 편했는지, 아니면 감옥을 안 가도 된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어졌는지 아이는 어느새 곤히 잠들어있었다.
그렇게 길게 이어진 내 얘기를 숨 죽이며 듣던 반 아이들 중 갑자기 우리 반 발표왕이자 맨 앞줄에 앉은 안경 쓴 00이가 한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한숨에 살짝 당황한 나는 그 연유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자신도 작년에 그런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그때 엄마에게 혼만 나고 자신의 마음을 물어봐주지 않아 속상했다고 했다. 마치 어제 일처럼 그 당시의 속상함이 얼굴에 생생히 드러낸 아이에게 나는 차분히 말했다.
"00아, 00이의 엄마도 선생님과 같은 마음이었을 거야. 다만 정신이 없고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 그랬을 뿐이야. 00이도 그때 많이 속상했겠네."
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교실 여기저기서 한 마음으로 "그러게, 속상했겠다." "괜찮아 나는 어제도 많이 혼났어"라며 거들어준다. 훈훈해진 분위기에 00이의 표정이 봄꽃처럼 환해졌다.
그리고 그날의 알림장 감사일기에 00이는 이렇게 써왔다.
"아들이 잘못을 해도 화를 참아주신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나는 그 감사일기를 보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리며 눈을 찡긋 해주었다. 돌아서는 아이의 뒷모습에서 광채가 나는 듯했다. 누군가의 마음에 반응하고 오롯이 공감해 줄 수 있는 마음씀씀이를 가진 저 아이는 분명 세상의 빛 같은 존재가 될 거라고 말이다.
나는 우리 집 아들에게도 그 감사일기를 전해주마 약속했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이해받은 아이는 또 누군가를 향해 따스한 공감의 마음을 전할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날 속으로 작게 다짐했다. 아무리 바쁜 월요일 아침이라도 아이들과 주말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또 어떤 누군가가 자신의 다친 마음을 내놓으며 따스하게 위로받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작가의 브런치 글에도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