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기 부천 53번 버스기사다. 이 버스는 새벽 4시부터 새벽 1시 반까지 운행하며 인천과 부천 시내를 도는 노선버스다. '53번 버스나라'의 운전대를 잡는 나는 대통령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법한 게, 우리 버스기사들끼리는 서로를 기사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연배가 높은 기사님들이 태반이고 기사라는 이름보다는 '국장'이라는 직책으로 불리고 있다.
대통령으로서 내가 매일 하는 일은 이렇다. 먼저 정거장마다 유심히 보고 한 명의 손님이라도 절대 놓치지 않고 태운다. 그리고 내 나라에 함께한 모든 국민들을 유심히 지켜본다.
새벽 첫차의 풍경은 어떨까. 대부분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쓰신 은퇴한 세대로 보이는 대리기사 분들의 귀갓길, 새벽 시간 분주하게 움직이는 환경 미화원 분들, 아장아장 걸음마로 버스에 오르는 아이들. 그리고 똑같은 속도로 오르지만, 자신의 몸을 가누고 물건을 싣는 용도로 쓰이는 끌차를 젖 먹던 힘을 다해 들고 오르는 어르신들, 또 기사와 승객들에게 출발이 늦어져 연신 '미안합니다'라며 주위에 사과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약을 타러 가시는 어르신들, 출근 시간 미리 회계장부를 보며 핸드폰으로 계산기 두들기는 경리, 취업책을 들고 공부하는 대학생, 버스를 놓칠세라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황제펭귄 같이 짐 들고 뛰어오는 아줌마들을 사이드 미러로 보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나와 함께 후미진 차고지까지 함께 하시는, 물류센터 노동자분들의 얼굴.
가급적 빨리 출발은 해야 하지만,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손님들로 인해 배차간격은 벌어지고 내가 쉴 수 있는 휴게시간은 줄어든다.
그러나 그럼에도 보람차고 감사하다. 이 분들에게 53번 대통령으로서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새벽 찬공기에 몸을 녹일 수 있는 온기 가득한 실내와 지친 마음을 달래줄 피아노 선율과 함께 안전한 운행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피아노 선율에 기도를 담아, 나와 이 버스에 타는 모든 분들이 안전하게 가족들과 해후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수고하십니다,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십니다'... 이렇게 화답해 주시는 분들. 그 분들과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서로 인사하고 그분들이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마음속 큰 힘을 얻고 동기를 얻으시길 기도한다.
매일 마주하는 얼굴들... 안전한 운행을 해야 한다
한편, 앞서 말한 배차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는 신호체계를 잘 파악해야 한다. 안전하게 운행을 하되 신호를 놓치면 시간이 딜레이 된다. 앞차는 멀어지고 뒤차는 쫓아온다.
앞차가 전기차면 스타트 속도가 다르니 조건부터 불리하고, 노련함이 더한다면 뒤차는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다. 급해진 마음은 무리한 운행으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이렇게 매일 53번 나라는 경쟁한다. 앞서 가지도 뒤쳐지지도 않고 적정 간격을 유지하고 안전한 운행을 해야만 한다.
신호 체계를 스무스하게 이용하되 안전하게 가야 한다. 나와 내 승객의 목숨을 담보로 몇 분 빨리 가고자 하지 않고 배차 시간과 같은 국가 경쟁력이 뒤쳐진다 해도 안전하고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신호체계를 무시하고 위반한다 해서 조금 더 빨리 가는 것도 아니다. 과태료와 벌점만 부여될 뿐이다. 원칙과 신호를 지키되 도로상황을 잘 파악해서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미세한 엔진소리도 최소화하며 효율적인 연비 운전도 신경 써야 한다.
이런 대통령을 위해 국민들은 정거장에서 핸드폰을 보다가 손을 흔들거나, 때로는 잘 안 보이는 듯 실눈으로 유심히 보시다가 내가 탈 버스가 아니라는 양 숨거나 먼산을 보거나 뒤돌아서거나로 내게 힌트를 주신다.
지금의 대한민국이라는 버스는 어떨까? 보통 멀리서 황색 신호등이 보이면 가야 될지 말아야 될지 분명히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빨간색 정당은 빨간 신호등임에도 신호를 무시하고 계속 달리는 것 같고, 파란색정당은 파란 신호등이면 신속하게 가야 하는데 반대를 위한 반대만 외치며 주춤거리는 모습인 것 같다.
29일 대통령과 야당대표의 영수회담이 열린다고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버스가 안전하고 신속하게 갈 수 있었으면 한다. 운전대를 서로 잡으려고 하다 사고 내지 말고, 오전조-오후조로 나눠서 서로 국장과 차장으로서 닥쳐온 민생을 위해 소임을 다하길 바란다. 승객들 다 타셨으면, 오라이~
덧붙이는 글 | 글쓰기 수업에서 발표한 글을 보강한 것으로, 다른 매체에 게재된 적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