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아침, 강아지를 데리고 공원 산책에 나선다. 집을 나서자마자 바람이 휘이익 부는데 서늘하다. 그제서야 앱으로 날씨를 확인해보니 오늘 최고기온은 12도, 곧 비가 쏟아질 예정이라 한다. '대체 봄은 언제 오는 거야' 우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전날 통화 나눈 서울 사는 동생은 선풍기 틀어야 할까 싶게 벌써 덥다고 하던데, 이곳 영국은 도톰한 겉옷이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선선하다. 기후 변화의 영향을 반대 방향으로 겪고 있지만, 한국도 영국도 절기를 거스르는 봄 날씨에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계속 되는 이상기온 그리고 작황 부진
집으로 돌아와 오늘자 신문을 펼친다. "빵, 과자, 맥주값 들썩 조짐"이라는 헤드라인이다. 역시나 인플레이션과 함께 기후변화가 주원인이었다. 지난 가을과 겨울, 영국은 평년에 비해 따뜻하고 비가 많았다. 국내 밀, 보리, 귀리 수확량이 같은 기간 대비 17.5% 감소했다고 한다. 감자마저도 수확량이 줄어 '영국 내 식량 자립도'가 우려된다고 전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공급 부족은 일시적이 아니라 고질적인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영국 사람들이 매일 소비하는 밀을 비롯한 곡류 가격의 상승은 당장 아침 식탁에서 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인플레이션으로 이래저래 생활비용에 쪼들리는 서민들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식재료 가격이 비교적 저렴했던 영국
처음 영국에 왔을 때 마트 식료품 가격이 한국 보다 저렴해서 좋았다. 특히 신선 제품이 비교적 싸고 맛있었다. 마트 빵 코너를 예로 들자면 국민 보급형 빵들도 맛이 좋고 그 종류가 다양해서, 최저 임금으로도 소비자의 상황에 맞게 골라 사 먹을 수 있는 점이 좋아 보였다. 이게 선진국 시스템이라는 것 인가보다 나름 부럽기도 했다. 요즘은 예전 같지 않다. 최근 3.4% 수준으로 인플레이션 수치가 떨어졌다 하지만 식품 가격은 여전히 3년 전보다 30% 더 높은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무렵, '해바라기씨유' 가격이 눈에 띄게 오르더니 나중에는 식용유 사재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매일 마시는 커피 원두값이 오르고 부담없이 선물로 주고 받던 초콜릿 가격도 하루가 다르게 오른다. 설탕, 소금 가격이 오른 것을 체감한 날은 나름 충격이었다. 인플레이션이 뭔지, 기후변화가 뭔지 그제서야 정신이 들고 관심이 생긴다. 기본 식자재의 주 산지인 남 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가 기후 변화로 몸살 중이었고, 농사 지을 곡창 지대가 물난리로 침수된 사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사진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신선 채소는 '원래 계절에 영향을 받으니까 곧 가격이 내릴 거야' 경험으로 미뤄 짐작해보기도 하고, '인플레이션이 곧 잠잠해지겠지' 희망도 가져보지만, 이미 몸살을 앓고 있는 기후 환경은 그리 쉽게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뭐 여기까지는 세계 모든 나라들이 경험하고 있는 애그플레이션(Agflation, 식품가격이 다른 제품이나 서비스에 비해 가파르게 상승함) 현상이다. 영국은 최근 수입물가 관련 또 하나의 이슈가 있다.
국경 강화로 인한 수입물가도 오름세
설상가상 영국은 일부 품목에 진행 중이던 '국경 목표 운영 모델(Btom, Border Target operating Model)'을 4월 30일부터 확대 시행했다. 전 정권 보리스 존슨의 브렉시트 협정에 따라 합의된 내용으로, 영국 국경을 통과하는 수입품의 제품 검역 및 세관 검색을 강화하는 정책이다. 대상은 EU를 포함한 다른 나라로부터 영국으로 들어오는 달걀, 채소 및 식물, 고기 및 생선 같은 식품 원자재 등이다.
이는 전체 영국 수입의 약 3%(210억 파운드, 한화 36조 원)에 해당하는 규모다. 식재료를 수입하는데에 원가 뿐만이 아니라 제도적 추가적인 비용 부담까지 더해지는 형국이다. 대신 자유무역 협정에 포함되지 않은 상품, 자동차, 연료, 금속 및 기타 비 식품 상품은 2년간의 관세 정지로 완화될 것이라고 한다. 먹고 사는 일은 더 팍팍해지지만 소비 제품 가격은 유지한다는 것이다.
지구 온난화는 생존 문제가 되었다
기후변화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탄소의 배출 감소 플랜이 정부 주도로 진행 중이다. 2050년까지 Net Zero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얼마 전부터 영국 정부가 그 속도를 줄이려는 모양새다.
설사 식량 위기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영국 정부가 어떻게든 물량 확보에 나설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재난 상황에도 어떻게든 살아남는 이가 있게 마련이다. 다만 식량문제는 일부가 아닌 전 인류적 문제라는 관점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정책은 선진국들이 계획대로 추진해 나가면 좋겠다. 탄소 배출의 주 원인을 제공하는 국가들이기도 하기 때문에 문제 해결에 책임이 있다.
영국 기상청 메트 오피스(Met Office)는 "이번 주말부터 예년 기온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전망을 내어 놓는다. 다만 "우리가 희망하는 그러한 화창한 폭염은 아닐 수도 있지만..."이라는 부연 설명을 덧붙이는 것을 보니 영국 섬 옆 대서양의 변덕을 확신하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말이다. 곧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피크닉으로 싸 온 샌드위치에 시원한 홉 맥주 마시며 마음 편히 즐기는 소확행의 기쁨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 사이트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