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식구는 이동이 많은 편이다. 나는 연고지가 경남 마산, 아내는 인천이다. 둘 다 서울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지금 사는 곳은 경북 예천이다. 어딜 가든지 이동거리가 길다. 또한 아이 둘과 아내는 모두 차로 이동한다. 기사는 아빠인 나다. 아내는 인근 도시까지 출근해야 해서 출퇴근 거리가 70km다.
2010년 아내를 만나고 지금까지 운전한 거리가 60만km가 넘는다. 이동거리가 많다는 건 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는 뜻이다. 차에서 무한정 '멍' 때릴 순 없는 법이고 시간을 보낼 거리가 필요하다. 한동안 아내 퇴근 때 아이들이 동행했다. 아이들은 '유리구두' 동화처럼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마법에 걸려 있고, 끊임없이 뭔가를 해야 한다.
동물소리 흉내 내기, 아무말 대잔치, 끝말잇기, 지나가는 자동차 이름 맞추기, 표지판에서 아는 글자 나올 때마다 소리 지르기 등을 하지만 오래 가지 않는다. 결국 동영상을 틀 수밖에 없다. 동영상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 게 노래 감상이다. 처음엔 주로 동요를 틀었다.
아이들이 어릴 땐 '뚜루루뚜루' 소리를 꿈에 나올 정도로 들었다. '아기상어'에 나오는 음이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취향이 바뀌어 핑크퐁, 타요버스, 헬로카봇, 캐치티니핑, 시크릿주주를 역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들었다. 아이들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변덕스럽다.
아빠도 듣고 싶은 노래가 있어
이제 '슬슬' 변화가 필요하다. 아빠는 꿈에서도 '뚜루루뚜루'를 들었다. 문득 아들 친구가 전에 우연히 불렀던 노래가 떠올랐다. '문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노래였는데. 검색해보니 안예은의 '문어의 꿈'으로 아이들 사이에 인기곡이었다. 별칭이 '초통령 노래'였다.
'문어의 꿈' 노래도 몇 백 번은 들었지 싶다. 슬슬 딴 노래가 듣고 싶을 즈음 아들이 "아빠 이 노래 알아?" 하면서 흥얼거린다. "아이스크림 사랑, 두근두근 상상, 달콤한 설레임..." 들어보니 괜찮다. "누구 노래야?" "몰라. 우리 춤 출 때 듣는 노래야." 찾아보니 애즈원과 이지라이프가 2012년에 발표한 노래다. 애즈원은 나도 아는 가수다. 아들 덕분에 옛날 가요를 알게 됐다. 유치원에서 참 다양한 노래를 소화하는구나 싶었다.
퇴근길 왕복을 함께 하니 차에서 있는 시간이 대략 1시간 20분은 되고 노래 몇 곡으론 어림도 없다. '아빠가 듣고 싶은 것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자, 이제 돌아가면서 듣고 싶은 노래 말하기 할까?" "좋아." 이렇게 아빠의 노래 선곡이 시작됐다. '뭘 고를까, 내가 좋아하면서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노래가... 너무 옛날 노래면 아이들이 힘들 텐데...'
고심 끝에 고른 가수가 싸이였다. '강남스타일' 'that that'이 반응이 좋았다. 역시 두 곡을 밥이 죽이 되도록 들었다. 아들은 'That that'이라는 대목을 '빼빼로'라고 불렀다. 듣다 보니 '빼빼로'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뒤 아들은 'That That'을 듣고 싶을 땐 "빼빼로 노래 틀어줘"라 말했다.
요즘 노래를 모르니 점점 과거로 가기 시작했다. 급기야 조용필 노래가 나왔다. '못찾겠다 꾀꼬리' '고추잠자리'는 아이들 애창곡이 됐다. 사람들 있을 때도 "아빠 신청곡"이라고 외치면서 두 노래를 찾았다.
내심 반신반의였다. '저 아이들이 아빠가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좋아한다고 하는 것 아닐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의심은 꽤 사실이었다. 아이들은 투명했고, 어른의 욕망을 읽었다.
딸은 박은옥의 '윙윙윙'을 좋아했다. 딸은 한 번 꽂히면 질릴 때까지 즐기는 게 특징이다. 아들은 골고루 좋아해서 노래도 꼭 섞어야 하고, 과자도 섞어야 하는데, 딸은 오로지 한 가지였다. 딸 앞에선 '윙윙윙'을 온 공간에 '윙윙윙'이 가득찰 정도로 틀어야 했다(지금은 다른 곡에 꽂혀 있다).
가사가 예쁘고 쉬운데 의외로 잘 외워지지 않았다. 다 외웠다 싶었는데 꼭 막히는 구간이 몇 곳씩 나왔다. 딸은 그 부분을 꼭 틀렸고, 자기 나름대로 개사해서 불렀다. 틀리는 부분은 작게 불렀고, 아는 부분은 목이 찢어져라 불렀다.
아내가 가세하면서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이 다함께 듣는 노래가 됐다. 아들은 눈치가 빠르다. 엄마가 있을 땐 꼭 듣고 싶은 노래로 '사건의 지평선'을 요청했다. 아내가 하루는 '사건의 지평선'을 듣다 "떠나간 강아지가 생각난다"는 말을 했다. 그 이후 아들은 '사건의 지평선'을 들을 땐 "아지(지난해 하늘로 간 강아지)가 보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한다. 아이들은 참 투명하다. 말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아들보다 한 살 어린 딸은 오빠 따라쟁이다. 하루는 오빠가 '아지' 이야기를 꺼내자 "아지 보고 싶어"라면서 울었다. 따라하는 걸 극대화 하려니 나온 반응이다. 아이들은 참 재밌다.
옛일이 되어버린 신청곡 타임
한편 아이들 기억력은 참 놀랍다. 1년 전 딱 한 번만 들었던 노래를 갑자기 기억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지난해 1월 아는 지인이 집에 놀러왔다. 강가에 가서 하루종일 놀았다. 주막에서 지인은 막걸리를 마셨고, 아이들은 파전과 국수를 먹었다. 아이들은 밸런스바이크를 탔고, 장난기가 발동한 지인이 아이가 타는 밸런스바이크를 타고 도망갔다. 아이들이 쫓아가면서 술래잡기가 시작됐다. 어느 지점에서 지인이 밸런스바이크 핸들을 잡고 자전거를 돌리기 시작했다.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아들이 그 부분을 정확히 따라불렀다. 집에서 놀다가 생긴 일이었다. 나도 모르는 노래였다. 기사 검색을 통해 소코도모의 '회전목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 번 꽂히면 무한반복하는 딸은 '윙윙윙' 다음 곡으로 '회전목마'를 골랐다.
이무진의 '신호등'이 '초통령 노래'라는 것도 아들을 통해 알았다. 사실 유치원 아이들이 즐겨 부른다 하니 '유통령 노래'라 불러야 했다. '신호등'도 꽤 많이 부르고 들었다. '신호등'과 '회전목마'를 정신없이 듣던 와중, 그 두 노래를 누른 건 뉴진스의 'Super Shy'였다. 어떤 매력이 있는지 아들과 딸은 틈 날 때마다 신청곡으로 'Super Shy'를 요청했다. 아이들 감성은 이해하기 어려웠고, 흥미로웠다.
아이들이 선곡한 노래를 귀가 멍멍해지도록 듣던 것도 이젠 옛 일이 돼 버렸다. 3월부터 아이들은 피아노를 배우러 다닌다. 매일 1시간 넘게 차를 타고 엄마한테 왔다갔다 하는 일이 안타깝게 느껴져서다. 갈 때는 노래를 듣거나 동영상을 보지만 돌아올 때는 어둠이 깔리고 지쳐서 대부분 졸았기 때문이다.
노래 듣던 그때가 살짝 그립기도 하고 가끔씩 생각난다.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시간의 한 페이지가 또 넘어가는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