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기간 동안, 기혼자 신분이었던 젊은 남성들이 참전했다가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 기사는 한국전쟁 중 군인과 경찰의 배우자 입장에서 남편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당시엔 여성의 경우 일제의 징용이나 정신대 차출을 피하기 위해 16세 내지 17세쯤 되면 결혼을 했다고 한다. 올해 기준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4년이 되니 그분들의 나이를 어립 잡으면, 생존해 계신 경우 90세 초반 정도로 추정된다.
이들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남편을 전장으로 떠나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통지서를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젊디 젊은 나이에 어린 자식과 함께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는 처지를 맞았던 것이다. 당시에는 모든 게 파괴돼 폐허 속에 빠진 국가가 그들을 최소한의 선에서마저 거둘만한 능력이 없었고, 더구나 남편 없는 시집살이는 결코 쉽지 않았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재혼을 하지 않은 경우 시가에서 분가하더라도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최우선 보호 대상임에도 사회의 시선은 냉랭했다. 일부종사(一夫從事)라는 유교관념이 남아 있었던 때였고, 홀로된 여성이라고 쉽게 보려는 경향마저 있었다. 심지어 자녀들을 향해선 '애비없는 자식'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배우자를 잃은 여성들의 유일한 탈출구는 일과 자녀교육이었다. 책 <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란 책을 보면 그들은 '나와 내 새끼'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한다.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내어 '장한어머니 상'을 수상하는 이도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 이면에는 그만큼 설움도 컸을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극한의 환경인 피난민 대열에 섞이기도 했고 시가로부터 버림받아 모자원에 입소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단순한 동정 대상 정도의 시선 때문에 받은 상처가 컸을 것이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의 가슴에 쌓인 한이 쉽게 삭지는 않았을 것 같다.
동작동 현충원은 유족이 '배우자 합장' 신청을 하면 적격여부를 심사한 후 허락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종합민원실에 자원봉사 중인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최장 60년 동안 안장될 수 있다고 한다. 지금도 대형버스가 배우자 잃은 여성의 장례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드나든다. 모두 한 많은 생애를 마치고 마지막 걸음을 하는 중인 것이다.
제일 먼저 정문을 통해 장례차량 일행이 도착하고 종합민원실의 안내를 받는다. 독립유공자 묘역 앞을 지나 조금 더 진행하면 당신의 마지막 보금자리 일보직전에서 '조국의 품에'라는 석조 조형물이 일행을 맞는다.
바로 뒷편에 제례와 봉안식을 행하는 건물이 있다. 남편은 70여 년 전에 먼저 자리했고, 당신은 모진 세월을 자식과 함께하다가 뒤늦게 배우자를 찾아가는 입구에 선 것이다.
엄숙한 장례 절차와 봉안식이 끝나면, 남편이 먼저 묻혀있던 옆자리에 누워 이승에서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영면에 든다. 동시에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나간 남편만의 이름이 새겨졌던 낡은 비석은 자리를 비워주고, '전사자의 군소속, 계급, 함자와 배위라는 글자와 배우자 함자'가 새로이 새겨진 묘비가 설치된다. 지나가는 참배객이나 행인들은 주인공인 당사자들이 합장이 돼 있음을 알게 된다. 간혹 전사자가 입대 당시, 어린 자녀나 유복자를 뒀으면 그들이 장성해 후손을 둔 경우 손자녀의 이름까지 측면에 새긴다.
그간 국군전사자에 대한 조명은 꾸준히 이어 왔다. 하지만 전쟁 중 배우자를 잃은 여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은 상당히 멀리 있었다는 생각이다.
선택적 조명이라는 말이 있지만 호국·보훈과 관련된 내용은, 작은 것이라도 적극 발굴해 널리 알리는 게 우리의 책무가 아닐까 생각한다. 현재에도 '대한민국 전몰군경 미망인회'이란 단체가 활동 중이다. 지금이라도 이같은 단체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또한 생존해 계신 분들의 여생이 더 따뜻할 수 있게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은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배위(配位) : 남편과 아내가 모두 고인이 된 경우 그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