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아이들을 키우는 집에서 'TV 안보기'가 유행이었다. 'TV 보는 대신 가족끼리 대화를 할 수 있다' 'TV 대신 책을 볼 수 있다' '놀이나 운동 등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멍' 때리는 것이라도 TV 보는 것보단 낫다' 등 이유는 많았다. 주변에서도 그 시기 TV를 없애거나 아예 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20대 시절 4년 빼곤 내내 TV와 더불어 산 내게 TV 없는 삶은 생소하다. 매 시기마다 즐겁게 본 TV 프로그램이 지금도 기억 속에 빼곡하다. 1970년대부터 TV를 봤으니 그 세월이 참 장대하다.
아들과 딸도 벌써부터 TV를 본다. 4살 땐 아기상어를 봤다. 그 이후 뽀로로를 봤다. 로보카 폴리, 꼬마버스 타요, 치링치링 시크릿 쥬쥬 등 아이들 사이에 인기있는 프로그램을 쭉 섭렵했다.
아이들 대상으로 만든 영상물들이 생각보다 재밌었다. 아내가 같이 보기도 하고, 내가 같이 보기도 했다. 과거보다 그림도 그렇지만 이야기 구성이 훨씬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이면 EBS에서 나오는 아침 프로그램도 꼬박꼬박 챙겨봤다. 아이들은 EBS 영상물을 보기 위해 주말에도 일찍 일어났고, 일어나면 곧장 TV 앞에 앉았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고 나니 이젠 안본 영상물이 없었다. 가끔 영화관에 가거나 영화를 결제해서 보기도 했지만, 가끔이었다. 아들과 딸은 몇 달 전부터 생소한 동영상에 빠져들었다. '민또 경또'(대한민국 유튜버로 구독자가 40만 명이 넘는다. 로블록스를 하는 게임 크리에이터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로블록스의 정체
아들 딸에게 "뭘 보니"라고 물었더니 '로블록스'란다. 로블록스를 열심히 한다던 지인네 초등학생 딸에게 물었다. "게임"이란다. 찾아보니, 정확히는 '온라인 메타버스게임 플랫폼'으로 게임의 종류가 몇 백 가지였다. 유튜버들은 수 백 가지 게임을 영상과 해설을 적절히 섞어서 '유튜브'에 올렸고, 아들과 딸이 빠져든 건 바로 그 영상들이었다.
설명을 들어도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 전까지 알던 게임과는 개념이 다른 게 분명했다. 알 수 없으니 아내와 나한테는 별로 재미있지도 않았고, 이상한(?) 영상일 뿐이었다.
나는 그러고 말았지만 아내는 달랐다. 항상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아내는 폰에 '로블록스'를 깔았다. 그리고 지인네 초등학생 딸에게 게임 방법을 배웠다. 열심히 배워서 며칠 동안 아들에게 전수했다.
아들은 며칠 동안 엄마 폰을 빌려서 '로블록스'를 했다. 딸도 하겠다고 '떼'를 썼고, 결국 폰을 손에 쥐었다. 오빠를 따라 몇 번 해봤지만 어려워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엄마 폰을 수시로 아들에게 빌려줄 순 없었고, 끝내는 "게임을 하는 건 나중에 다시, 너희들 커서 휴대폰이 생기면 그 때 얘기해보자"면서 일단락지었다.
그 뒤 아들과 딸은 '유튜브'에서 로블록스를 보는 데 빠져들었다. 대부분의 집이 그렇겠지만 우리집에도 간단한 규칙이 있다. 모든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먼저 씻는다. 그 다음엔 숙제를 한다(아들은 매일 글쓰기, 산수, 도형 숙제를 한다. 딸은 숙제를 하지 않는다.) 이후 밥을 먹고 남는 시간이 있으면, 그때는 논다. 취침시간은 9시. 해야 할 일을 다하지 못하면 놀지 못하고 자야 했고, 빨리 마치면 노는 시간이 생겼다.
아이들은 처음엔 다 마치지 못하고 자기 일쑤였다. 점점 체계가 잡혔다. 빨리 씻고, 빨리 숙제를 끝내고, 빨리 밥을 먹었다. 자기 전까지 남는 시간이 생겼다. 그 전엔 자기들끼리 놀거나 아빠랑 놀았다. 올해 2월부터는 로블록스 시청이 1순위가 됐다. 밥을 다 먹고 나면 그 때부터 설거지를 하고 집안 정리를 해야 했기에 아들 딸이랑 놀 시간이 없었다. 아들 딸은 얌전히 TV 모니터로 '유튜브'를 찾아 '로블록스'를 시청했다.
나는 내심 못마땅하긴 했다. 일단 내 눈에는 전혀 유익해보이지 않았다. 재밌으면서도 유익한 프로그램도 많을 텐데, 아이들은 하필 왜 저 프로그램에 빠진 걸까 의아했다. 당분간 지켜보기로 했다. 무조건 유익한 것만 받아들이는 게 좋은 게 아니라 유익한 것과 무익한 것을 골라낼 줄 아는 게 더 중요하다 싶었다. 또한 모든 과제를 수행하면 하고 싶은 대로 놀 수 있다고 약속했다. 약속은 약속이었다.
두달쯤 되니 서서히 불안해졌다. 그렇다고 '로블록스 보지 마'라고 강요할 순 없었다. 그건 아빠의 약속 위반이었다. 아들이 언젠가부터 '죽었어'라는 말을 빈번히 사용했다. 딸도 따라 했다. '때려'라는 말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실제 아들이 딸을 때리는 일도 벌어졌다. 정색하고 심하게 때린 게 아니라 장난이었지만 위험신호로 받아들였다.
2주가 더 지났다. 방에 들어가서 아이들 영상을 살짝 봤다. 극중 캐릭터가 도끼와 칼을 들고 있었다. 어두운 화면에 음침한 표정을 한 캐릭터가 '낄낄낄' 웃었다. 섬뜩했다. 이제 명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동생이 오빠에게 맞아 '앙' 하고 우는 일이 벌어졌다(실은 아주 살짝 맞았다, 마침 현장을 목격했다). 지금이 기회다 싶었다.
자기 전 아들을 따로 불렀다.
"아들, 요즘 이상해졌어. 아들은 꽃을 좋아하고 나비를 좋아하잖아. 그런데 언젠가부터 '때려'란 말을 많이 쓰기 시작했어. 실제 동생을 때리기도 하고. 왜 그런 것 같애?"
"(10초 정도 생각) 잘 모르겠어."
"아빠 생각엔 '로블록스'를 보면서 그렇게 된 것 같아. 그 전엔 그렇지 않았거든. 아들 생각엔 어때?"
"(30초 정도 뜸을 들인 뒤) 그런 것 같아."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묵묵부답)"
"아빠 생각에는, 때리지 않고, 거친 말 쓰지 않고, 잔인한 장면이 나오지 않고도 재밌는 동영상들이 있을 것 같다. 아들 생각은 어때?"
"(바로 대답) 그런 것 같애."
"그러면 앞으론 '로블록스' 말고 다른 동영상도 보자. 아들이 먼저 괜찮다고 생각하는 동영상을 찾아봐. 그리고 엄마한테 한 번 봐달라고 하고."
전쟁이 시작됐다
이 일 이후로 우리집에서 아들과 딸이 유튜브로 로블록스를 시청하는 일은 사라졌다. 아는 지인네 아들은, 고등학생 때 게임으로 인해 몇 백 만원을 지출했다고 한다. 엄마가 뒤늦게 알고서 그 돈을 갚느라고 허둥지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폰을 사용하는 연령은 점점 어려지는 중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초등학생을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다. 몇 살 때 폰을 처음 사용했는지 물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란다. 빠른 건지, 늦은 건지 물었다. 늦은 거란다. 보통 몇 살 때 사용하는지 물었더니 초등학교 들어가면 보통 폰이 생긴단다. 빠른 애들은 유치원 때부터 사용한단다. 하긴 유치원생이 폰을 들고다니는 걸, 나도 보긴 했다.
요즘 세상에서 폰은 거의 만능이다. 폰이 생긴 아이들이 폰으로 게임을 하고 결제를 하는 걸 과연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막는다고 애를 쓴다고 한들 그걸 다 막을 수 있을까.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면 답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폰과의 전쟁, 게임과의 전쟁, 영상물과의 전쟁이 이제 시작된 듯 싶다.
한편, 어쩔 수 없이 휴일 내내 집에 있는 경우엔 가족들 모두의 동영상 시청 시간이 늘어난다. 그래서 최근엔 새로운 규칙을 정했다. 휴일엔 오전 1시간, 오후 1시간, 평일엔 1시간으로. 아마 이런 식의 규칙은 앞으로도 계속 그때 그때 바꾸게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