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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지인 소개로 아내를 만났다. 당시 지인은 나와 만난 지 반년 정도 된 사이였다. '나를 어떻게 알고 소개를?' 싶었지만 알고 보니 소개 성공률이 꽤 높았다. 세 쌍인가, 네 쌍인가 소개했는데 모두 잘 만나서 결혼까지 이어졌다. 사람을 파악하는 능력이 꽤 좋은 게 아닌가 싶었다.

아내와 나는 줄곧 먼 남쪽 지방에 살았고, 지인은 서울에 살았으니 만날 일은 거의없었다. 1년에 한 번 근황 정도 물을 뿐이었다. 2017년 오랜만에 만났다. 창녕에서 대전으로 이사를 한 직후였다. 집들이를 핑계로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만났다.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지인과는 매일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또 흘렀다. 사진을 찍던 지인은 궁궐에서 일하는 것으로 업을 바꾸었다. 우리는 대전에서 영주로 다시 예천으로 집을 옮겼다. 그 사이 아이도 둘이 생겨 가족이 넷이 됐다. 어떻게 연락이 닿아 올해 2월 서울에서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면 어색한 사람이 있고,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후자를 아마 친구라 할 것이다. 지인은 후자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

결혼은 했으나 아이가 없는 지인은 아이들을 보자 얼굴이 환해졌다. 아이들에게 장난을 걸기 시작하자 금세 "삼촌" 하며 '깔깔깔깔' 하는 아이들이었다. 급기야 아이들은 서로 삼촌 옆에서 먹겠다고 신경전을 벌였다. 식당에 들어서고 몇 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인이 아이들과 노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건지, 아이들이 지나칠 정도로 붙임성이 좋은 건지 모르겠다.

'삼촌'과 노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 아이들에게 먹는 건 뒷전이었다. 덩달아 지인도 밥을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자, 밥 먹고 놀자. 자리에 앉자"라고 말하자 '힝' 하며 '뽀로통' 표정을 짓는 아이들. 그 모습을 본 지인이 깜짝 제안을 했다.
 
 7년 만에 만나서 1박2일 동안 아이들을 돌봐주겠다는 지인. 상상도 못한 제안이었다.
7년 만에 만나서 1박2일 동안 아이들을 돌봐주겠다는 지인. 상상도 못한 제안이었다. ⓒ 김대홍
 
"이번 5월달에 제가 아이들을 맡을게요. 이틀도 괜찮고 사흘도 괜찮아요. 두 분이서 오붓한 시간 한 번 보내보세요. 아이들 생기고 나선 한 번도 두 분이서 시간을 못 지냈을 거잖아요."

생각도 못한 제안에 아내와 나는 서로 얼굴만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 지인은 서로를 잘 아는 사이지만 7년 만에 만났다. 아이를 기른 적도 없다. 오랜 만에 만난 자리에서 아이를 몇 분 보고 하는 이 깜짝 제안. 아이들을 몇 년 동안 본 그 누구도 한 적 없는 제안이었다. 먼저 지인이 걱정이 됐다.

"애들이랑 있으려면 아주 힘들 텐데요. 애들이 워낙 천방지축이라. 에너지가 많아서 아무리 뛰어도 지치질 않고. 아침엔 얼마나 일찍 일어나는데요. 괜찮겠어요?(우린 좋은데, 정말 감당할 수 있겠니?라는 뜻이다)"

지인이 거의 0.5초 만에 답했다. "그럼요." 이렇게 고민 없이 할 수 있는 건가? 이런 제안이? 보아하니 부인과 상의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지인은 괜찮다 했다. 흠. 이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5월이 됐다. 운명의 그 날. 아내가 서울에 일이 있는 날 지인과 약속을 잡았다. 지인은 자기 집에서 점심을 함께 하자 했다. 지인이 사는 집을 그날 처음 구경했다. 눈이 돌아가는 집이었다(내 입장에서). 미니어처가 가득했다. 방에 들어가자 각종 권총들이 벽 하나 가득했다. 권총 사이에 광선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영화 <스타워즈>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제다이의 광선검이었다.

"이거 불도 들어오는 거예요? '징징' 소리도 나는 거고?"

지인은 앞에서 곧장 시범을 보였다. 영화와 똑같은 형광색 불이 들어오고 광선검 두 개를 맞부딪히자 '징징' 소리가 똑같이 났다. 더 신난 건 나였다. '와와' 하는 소리가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나는 '놀아주는' 어른보다 '노는' 어른이 더 아이에게 맞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놀아주는' 어른은 결국엔 지친다. 아이는 신나지만 어른은 신나지 않다. 아이도 그걸 안다. 놀아주는 어른과는 다음을 기약하기 힘들다. '노는' 어른은 다르다. 내가 보기에 지인은 '노는' 어른이었다. '됐다' 싶었다.

슬쩍 보니 프로그램이 가득이다. '게임하기', '도너스 만들기', '산책하기', '도서관 가기' 등 7-8개는 된다. 지인에게 몇 가지 참고사항을 전달했다.

"첫째는 야경증이 있어요. 자다가 울어요. 꿈 속에서 우는 거라 기억을 못해요. 코피도 자주 흘려요. 둘째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을 긁어요."

점심을 먹고 아내와 나는 갑자기 무한 자유를 얻었다. '이제 뭘 하지'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막상 할 게 없었다. 막막했다. 우리를 구한 건 서울 친구네였다. 이사를 한다는 첩보를 접했다. "집 보러 다니자."

우리가 친구를 차에 태우고 서울 구경을 시작했다. 성북동, 미아동, 수유동을 돌아다녔다. 재밌었다. 오랜만에 서울 사람들 사는 모습을 엿봤다. 태어나서 두 번째로 회전초밥을 먹었다. 다 지인이 준 선물이었다. 오후 9시 11분 지인이 보낸 카톡 신호음이 들렸다.

"아이들 잘 놀고 방금 자러 들어갔어요. 희(딸)는 조금 일찍 기절 ㅎㅎ 그리고 우(아들)도 이제 9시니 들어가서 자자~ 이랬더니 바로 들어가서 불 끄네요. 취침습관 굿굿^^."

사진이 몇 장 보였다. 열심히 산을 타는 모습, 붓으로 수묵화를 그리는 모습, 닌텐도 게임을 하는 모습,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 잠든 모습이었다. 평화롭고 유쾌한 풍경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무사히 하루가 잘 끝났구나 싶었다. 아내가 나를 보며 물었다.

"아이들 보고 싶지?"
"전혀. 내일이면 볼 텐데 뭘."


아내가 나를 보고 웃었다.

아이들 덕분에 한 놀라운 경험

이튿날 점심 때 다시 만났다. 도넛을 다 만든 아이들은 침대에 드러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나타났지만 본체만체다. "얘들아 안녕"이라고 하자 '응' 하면서 다시 TV에 시선 고정이다. 아유, 저것들을 그냥.

지인은 어제 들은 정보가 아주 도움이 됐단다. 아들은 자다가 코피를 두 번 흘렸지만 미리 들은 정보 덕분에 놀라지 않고 대처했단다. 딸이 자다가 울었지만 잘 다독여 금세 재웠단다. 아이들이 떼를 쓰지 않아 놀랐단다. 뭘 하자고 하면 잘 따라서 힘들지 않았단다.

딱 한 번 의견충돌이 있었단다. 산에 가는 것과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을 하기로 했는데 아들은 산에 먼저 가자고 하고, 딸은 아이스크림을 먼저 먹자고 했다. 평소 성향대로다. "먼저 산에 가자" 했더니 딸이 울음을 터트렸다. 지인은 "그럼 산에 갔다가 내려오자마자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달랬다. 잠시 뒤 딸이 울음을 그쳤단다.

인사를 잘해서 신기했단다. 동네 사람들 만날 때마다 인사를 잘해서 데리고 다닐 때 흐뭇했단다. 더불어 아이들 덕분에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제가 손에 뭐 묻는 걸 엄청 싫어해요. 기름, 아이스크림 같은 걸 묻는 걸 끔찍이 싫어하거든요. 제가 말을 안해서 모를 거예요. 어제 낮에 둘 다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녹아서 손에 다 묻은 거예요. 언덕이라 애들이 지쳐서 못가는데, 제가 '얘들아' 하면서 손을 잡고 뛴 거예요. 아이스크림이 잔뜩 묻은 그 손을요. 제가 그런 행동을 하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지인이 1박2일 동안 아이들을 돌본 건 우리도 처음이고, 아이들도 처음이다. 물론 지인도 처음이다. 다행히 서로가 유쾌한 경험이었음이 느껴졌다. 지인은 아침 풍경을 전했다. 아이들은 아침 5시에 눈을 떴단다. 놀고 싶은 아이들일수록 일찍 눈을 뜬다. 지인이 "30분만 더 자자"고 했더니 애들이 "예" 하면서 누웠단다. 다시 30분이 지나자 아이들이 '톡톡' 거리며 깨우더란다.

"제가 어제 애들이랑 같이 지내면서 두 분한테 특별히 도움 주는 게 없겠다 싶었어요. 1박2일이 특별히 긴 시간이 아니라 두 분이 뭔가를 계획하기엔 짧구요. 애들도 힘들게 하지 않았구요. 그런데 오늘 아침 깨달았어요. 아침의 여유. 이건 내가 확실히 두 분한테 도움을 줬겠구나."

아내와 나는 웃었다. 공감하는 웃음이었다. 덕분에 늦게까지 푹 잤으니까. 자, 이제 이별의 시간.

"얘들아, 양말 신고 짐 챙기자. 이제 집에 가야지."

갑자기 공기가 이상하다. 폭풍전야라 해야 할까. 조용하다. 뒤를 돌아보니 아들 얼굴이 이상하다. 울먹거린다. 쳐다보자 '우왕' 하면서 울기 시작한다. "왜? 왜? 왜? 헤어지기 싫어서?" 덩달아 지인의 아내가 눈물을 훔친다. "저는 남이 울면 같이 눈물이 나요." 아이쿠야 갑자기 눈물 파티다.

아들은 눈물을 그칠 줄 모른다. 딸은 계속 게임 중이다. 눈물 흘리는 아들과 게임에서 못빠져 나오는 딸을 붙잡고 '양말 신어라', '옷 입어라', '이제 짐 챙기자', '인사해야지' 하니 20여분이 지나간다.

이제 두 번 만난 '삼촌'에게 '푹' 빠진 아이들. 1박2일 놀고 '가자'고 하니 우는 아이들. 1박2일 동안 아내와 나는 깜짝 자유를 얻었지만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어이없다 해야 할지. 헤어지는 집 입구에서 지인이 인사를 건넨다.

"우리 1년에 한 번씩 이렇게 만나요. 이맘때 제가 오늘처럼 애들이랑 놀게요."

1박2일 깜짝 이벤트가 정례행사가 되는 순간이다. 이제 견우와 직녀처럼 1년에 한 번씩 단 하룻밤 애들과 헤어지는 시간이 생겼다. 애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서로에게 참 신비롭다(놀랍게도 이 일이 생긴 지 1주일 뒤 14년 만에 오랜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친구가 지인과 똑같은 제안을 했다).

#친구#보육#양육#깜짝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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