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화로 달려가는 이 시대의 노인 문제를 알기 쉽게 이해하고 생각해보기 위해 다양한 노년 관련 영화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갑니다.[기자말] |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을 수 있습니다.
피폐하고 아름다운 영화
영화 <아무르>는 일반 사람들이 '프랑스 영화'에 대한 편견–자극적인 재미는 별로 없고 조용하며 사색적이다-에 매우 부합하는 영화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참으로 아름다운 영화'라는 평 또한 매우 어울린다. 노부부의, 그것도 질병과 그 돌봄으로 피폐해가는 삶을 그렸음에도 매우 미학적인 장면과 은유적인 미장센이 돋보인다.
영화가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질병에 걸린 안느(엠마뉴엘 리바 분)도, 그녀를 돌보는 남편 조르주(장-루이 트린티냥 분)도 영화 내내 줄곧 인간의 존엄에 대한 집착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유명 피아니스트가 된 제자를 키워냈을 정도로 훌륭한 음악가였던 안느는 갑작스럽게 경동맥이 막히는 질병으로 오른쪽 반신이 마비되고 만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온 날, 안느는 남편 조르주에게 다시는 자신을 입원시키지 말라는 부탁을 한다. 병원에 가면 아무래도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비인간적 처치를 '당할' 수 있을테니까.
여기서부터 안느가 가진 자존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지키고 싶어하는지 알 수 있다. 망설이던 조르주는 결국 약속을 한다. 그 후 시간이 지날수록 병세가 점점 악화되는 안느는 조르주에게 부담이 되는 자신의 모습을 우려한다. '이대로는 안 돼, 끝내고 싶어'라는 말에서 그녀가 스스로 생을 마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조르주는 그녀를 살뜰하게 돌보고 간호사와 이웃의 도움을 받아 살림과 돌봄을 곧잘 해낸다. 하지만 딸이 방문했을 때조차 점차 병세가 악화된 안느를 보여주려 하지 않는 모습에서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은 안느만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인가
영화는 우아한 음악가였던 안느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쇠약해지는 과정을 통해 인간이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서 지켜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 유난스러운 까탈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본성임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 영화를 통해 많은 의문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죽음의 과정에 있어 '존엄'이란 무엇인가. 적극적인 병원 치료를 받으려는 삶의 의지는 존엄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는가? 또한 죽음이란 무엇일까. 환자의 상태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환자가 '죽어도 될' 상태라 말할 수 있는가.
2022년 6월, 안규백 의원은 '조력존엄사법'을 발의했었다. '말기 환자로서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환자들의 경우에는 본인이 희망하는 경우 담당 의사의 조력을 받아 자신이 스스로 삶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하는 조력존엄사를 도입함으로써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증진'하자는 취지였다. 안규백 의원이 이 법안을 발의하게 된 사연이 있었다. 의원의 모친이 임종 전 8개월 정도 요양병원에서 지냈는데 그 시기가 가족 모두에게 고통의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환자는 치료의 중단을 원했고 가족도 그에 동의했음에도 의사는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환자가 연명의료결정법의 대상 즉, 임종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되는 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임종기 환자로 판정이 나면 의사들은 그 환자의 호흡기나 승압제 등 몇 가지 연명치료만 남기고 다른 치료는 멈출 수 있고 거기에 더해 보호자가 합의하면 이러한 연명치료 또한 중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의원의 모친은 이러한 임종기에 있다고는 볼 수 없는, 일말의 회생 가능성이 있는 환자였기에 의사가 치료의 중단을 시행한다면 사람을 살려야 할 의사가 결국 사람을 죽이게 되는 꼴이 되므로 이를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족들도 못 알아본 채로 그저 누워만 있는 모친의 상태를 보며 그 치료 기간이 생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낀 안규백 의원은 죽음에 본인의 의사가 개입될 여지를 법이 조금이나마 허용해야 인간이 존엄을 지키며 죽어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유럽에서 안락사가 허용되는 국가는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등이다. 아직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는 프랑스는 2023년 정부가 '프랑스식 임종 선택 모델'을 마련하기로 했으나 의사들은 아직도 '사람들이 자살하는 행위에 의사들을 참여시키면 안 된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 죽음에 관한, 그리고 존엄한 죽음에 대한 논의는 전세계에서, 여러 가지 각도로 다양하게 이루어지지만 그 누구도 '정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인류가 존속하는 한, 계속 논의될 문제가 아닐까?
돌봄과 죽음을 이야기하자
영화 속 부부는 투병 기간 내내 자존심을 지키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외로움을 감당해내야 한다. 사실 돌봄은 환자와 돌봄자 간 매우 내밀하게 이루어지는 일이고 그래서 돌봄을 해보지 않은 다른 이들은 절대 알 수 없는 공고한 관계가 형성된다. 안느가 물 먹기를 거부해서 부부 간 다툼이 생기거나 돌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간호사와 조르주가 언쟁을 하는 등의 일은 외부인들은 전혀 알지 못할 고충이다. 심지어 그들의 딸마저도.
영화는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끝이 난다. 과연 이들에게 존엄한 죽음이 가능했을까? 영화적 환상이 가미되어 초현실적인 장면으로 끝이 나는 이 작품은 2012년 깐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렇듯 내밀한 노인 돌봄과 죽음의 존엄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사회적인 이슈로 승화하면서도 작품의 예술성 또한 놓치지 않아 호평을 받았다.
여론조사업체 한국리서치가 지난 2022년 7월에 안규백 의원의 발의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응답자의 82%가 조력존엄사 입법화에 찬성했다. 그 이유로는 환자의 권리 보장과 환자와 가족의 고통 경감 등을 들었다. 그러나 이 법안은 의사협회의 반대에 부딪쳤고 사회 전반적으로도 아직은 인간의 죽음에 있어 윤리성과 도덕성을 가장 우선시하는 분위기 때문에 법률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일 수 있다. 건강할 때 우리는 '내가 죽으면...'이라며 죽음 뒤를 상상하지만 죽음 자체와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죽게 될지 생각해보고,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사회적인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은 앞으로 꼭 필요한 일이다.
* 참고도서 : <각자도사 사회>(어크로스)
덧붙이는 글 | 플랫폼 alookso와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