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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井施主金環, 嘉慶三年六月OO成"

1798년 6월, 김환이라는 사람이 석정을 시주하다. 완도군의 장좌리사지에서 발견한 빗돌에 새겨진 명문이다.

장좌리사지(중암사지)에서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까지 유지됐던 사찰 건물지와 석축이 확인됐다. (재)불교문화재연구소가 참여한 '완도 장좌리사지 시굴조사' 결과 지난 12일 사찰 건물지와 석축, 담장이 확인됐다. 기와편과 백자편, 그리고 도기편 등이 함께 출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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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된 유물 중에는 고려기와 문양에서 흔히 드러나는 어골문(빗살문양)과 격자문이 결합된 복합문이 확인돼 절터는 '려말선초'에 운영된 것으로 분석됐다.

장좌리사지는 완도읍 장좌리 산16-289에 있는 사찰 터로, 국가유산청이 발굴허가를 받아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지난 5월 21일부터 29일까지 시굴조사를 진행했다. 확인된 절터는 석축을 축조하고 건물을 배치하는 산지가람 형식을 갖췄다.

장좌리사지 시굴조사는 장좌리 법화사지에 이어서 완도의 불교 유적을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유적의 전모를 밝힐 수 있는 정밀 발굴조사가 계속해서 진행되어 지역의 역사와 학술적 자료를 축적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날 학술 자문회의에 참석한 자문위원들은 장좌리사지 유적이 법화사지와 함께 완도군의 불교문화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자문위원들은 유적의 규모와 성격을 밝히기 위해 조속히 정밀 발굴조사가 필요하며, 그 결과에 따라 완도 청해진 유적, 법화사지와 연계된 정비 계획이 수립돼야 한다는 의견을 모으기도.

전국에 걸쳐 유적 발굴조사가 활기를 띤 가운데, 인근지역 해남군의 백포만 일대에서는 중국과 한반도, 일본을 아우르는 국제무역항의 증거가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국립목포대박물관이 참여한 송지면 군곡리 패총 9차 발굴에서 배 모양 토제품과 아궁이 모형이 출토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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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발굴에서는 구릉 동쪽 경사면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를 거쳐 삼국시대 유적이 순차적으로 층을 이루는 패각층이 확인됐다.

철기시대 패각층에서 발굴된 아궁이와 배 모양 토제품은 길이 9.3㎝, 너비 3.4㎝, 높이 2.7㎝로 마치 전통배의 구조를 본떠서 만든 미니어처이다. 평저선 형태의 평편한 바닥의 모형 배에는 배의 머리와 선미가 뚜렷하게 식별되고, 토제품 안쪽에 노걸이와 돛 등을 설치하는 구멍이 확인돼 실제 배 모양과 흡사했다.

아궁이 모양 토제품은 길이 9.3㎝, 높이 4.4㎝이다. 위쪽 솥 걸이는 직경 4㎝로 솥을 걸쳐 놓을 수 있고, 앞쪽에는 연료를 넣을 수 있는 형태를 띤다. 떡 시루와 같은 모형도 함께 출토됐다. 구조와 형태로 보아 실제로 사용했다기보다는 당시 고대인들의 부뚜막에 대한 신앙적인 의례용품으로 해석된다고 학계는 보고했다.

배 모양 토제품으로 학계에서는 당시 군곡리 일원이 거대한 항구도시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유적 주변에는 접안시설이 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이번 출토된 토제품의 경우 실물을 본떠 만들었다는 점에서 당시 고대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 자료가 확보됐다. 군곡리 패총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에 걸쳐 형성된 유적지로 중국과 한반도, 일본열도로 연결되는 해양 교류의 국제무역항이다. 

특히 구릉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는 패각층 규모는 국내에 알려진 다른 패총 유적들과 비교할 때 최대급에 속한다고.

군곡리 패총은 지난 80년대 초 지역의 문화원장을 지낸 황도훈씨가 지역의 고대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 그는 학계의 전문가와 수차례 의논한 뒤 3차에 걸쳐 시굴조사를 하면서, 국가사적 지정을 해 놓았다. 그 결과가 지금 빛을 보고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연구기관에서는 그때 해남군이 유적을 국가사적으로 등록 결정을 한 것을 두고 "신의 한 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군곡리 패총 발굴조사는 8% 정도 이뤄졌지만, 이를 통해 발견된 유물만으로도 해남군의 백포만 일대가 고대 무역항으로서 동북아시아 지역들과 해양 교류를 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해상 무역기지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지난 2011년 국가유산청이 전국사지조사 사업을 추진하여 장좌리사지 현황조사를 먼저 시행하고, 제주도 법화사지 학술대회 때 완도군에서 불교문화재연구소장인 호암 스님과 면담 기회가 있었다. 

그때 완도군 법화사지와 관련해 완도의 불교유적을 조사할 수 있도록 신우철 군수와 호암 스님이 의견을 나눴다. 완도군의 법화사지와 관음사지 중간에 위치한 장좌리사지 조사를 시작해 보자는 이야기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됐던 것. 이를 국가유산청이 받아 들였다. 이후 전국의 중요 폐사지 조사 사업에 완도군이 사업의 대상지로 선정됐다. 중암사지로 일반에 알려진 장좌리사지는 국가유산청에 등록된 명칭이다.

완도군에서는 법화사지나 장좌리사지를 청해진의 장보고 유적에 포함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연구원 측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 상황에서 쉽게 거론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장보고가 활동한 9세기 중엽의 유물 발굴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장보고와 관련성이 있다고는 아직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2~3년에 걸쳐 정밀발굴조사가 진행되고 난 후 학술발표를 통해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 

장보고를 연구한 학회의 주장만을 가지고 장보고의 영역을 무작정 끼워 맞추려는 것은 올바른 수순이 아닐 게다. 장보고 관련 유적조사에만 함몰된 역사인식이 완도군의 해양문화를 정립하는 데 과연 옳은 것인지 큰 고민이 필요할 때이다.

청해진의 역사를 완도에만 국한시키려는 모순에서 이제는 탈피해야 한다. 장보고에 더 이상 굴레를 씌우지 말자. 이미 장보고를 선점한 완도군이 장보고 이전의 해양역사를 정립하지 못한다면 청해진의 해양문화는 시대를 거슬러 가는 패착일 뿐이다. 장보고의 꿈, 장보고는 오늘도 자유로운 항해를 꿈꾼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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