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전시장면
 전시장면
ⓒ 이혁발

관련사진보기


어느 작가에게 예술작업은 아무런 조건 없는, 그저 뜨거운 사랑이다.

황홀한 사랑 같은 예술

온라인 물품 최저판매가인 '990원'을 차용하여 손가락 두 마디 크기 정도 되는 작품 하나당 990원에 파는 전시가 부산에서 열렸다.

이 1000여 개쯤의 작품이 전시장 바닥에 나열되어 있다. 다 팔아봐야 백만 원도 안 된다. 작품 판매에 생존을 거는 전업 작가에게는, 작은 작품 하나 정도의 가격밖에 되지 않을 금액이다.

16일 현장에서 백보림 작가를 만나, 이렇게 작품을 팔아서 어떻게 작품활동을 하느냐고 물었다. 작가는 이것저것 미술 관련한 여러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돈이 만들어내는 작품에 얽매이지 않고 지속적인 작품활동을 하는 이유를 물었다. 작가는 자신이 전시를 앞두고 느끼는 감정, 그 긴장감과 매혹적인 떨림은 연인과의 사랑과 유사하다고 답했다. 사랑의 호르몬인 도파민이 연인이나 작품활동에서나 유사한 물량으로 폭증한다는 설명이다. 

이날 만난 백 작가에겐, 작품 제작과 발표과정 자체가 황홀하고 전율을 일으키는 사랑인 것이다.

인류 멸종에 대한 예술적 보고서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작품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작품들
ⓒ 이혁발

관련사진보기


작가는 앞서 9번 개인전을 하였지만, 전시회가 끝나면 대부분 작품을 폐기물 처리했다 한다. 미래에 작업하려고 사들였던 물품(오브제)들만 열심히 보관하고 있고 나머지 작품들은 거의 버렸다고 한다.

이번 전시장에 전시된 작품들도 전시가 끝나면 버릴 예정이라고 한다. 행위작업이나 설치작품이나 같은 것을 두 번 전시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자신의 작업을 전시 후에 버리는 작가는 많지 않다. 거의 없다. 백보림 작가는 버림으로써 오히려 소유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이것은 미술계나 미술시장이 박물관으로 직진하고 있는 것에 대한 보이지 않는, 기록되지 않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매번 새로운 작업을 찾아 떠나는 진정한 예술 유목민이었다.
 
이 작은 작품 하나하나에 작가 이름이 들어간 도장이 찍혀 있다.
 이 작은 작품 하나하나에 작가 이름이 들어간 도장이 찍혀 있다.
ⓒ 이혁발

관련사진보기

 
백 작가의 지난 몇 년간의 작업 주제는 '유물'에서 기인한 '인류의 멸종'이었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특정계층 인간의 멸종'이었다. 이 특정 직업(계층)의 사라짐은 일종의 인류 멸종 신호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번 '990원 작품 판매'도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경쟁의 극단을 재연한 것이다. 해외 직구의 990원 판매가는 국내 온라인 쇼핑 생태계에 영향을 주고 있고 그 영향으로 많은 수의 멸종이 진행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멸종이 확인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이것이 멸종 신호의 하나로 충분히 바라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이 전시는 작가만의 시각으로 특정계층 인간의 멸종 가능성을 다루는 예술학적 관점으로 써 내려간 보고서인 것이다.

지난 16일, 작가가 전시장에서 벌인 퍼포먼스는 작품제작과정 실연 같은 것이었다. 작가가 중간중간 실시간 제어(믹싱)하는 전자음악(공장기계음과 비슷한)이 흐르는 가운데, 작가는 직접 그린 노년의 자기 얼굴 가면을 쓰고 앉아 손가락을 오무려 반복적으로 작업을 만들어내서 바닥으로 통하는 원통으로 내려보낸다. 인간이 찍어내는 기계 같은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작가는 기계 부품화되는 인간의 모습을 시연하는 것이라 했다. 인간이 기계의 하위부품화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했다. 이번 작업은 한 젊은 예술인이 현시대상황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작품으로 풀어낸 발칙한 풍경화인 것이다.
 
행위미술 하고 있는 장면, 오른손으로 작품을 찍어내서 왼쪽에 있는 원통으로 내려 보낸다.
 행위미술 하고 있는 장면, 오른손으로 작품을 찍어내서 왼쪽에 있는 원통으로 내려 보낸다.
ⓒ 이혁발

관련사진보기

 
숭고한 '예술 놀이' 

작가는 '멸종'이라는 무시무시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싱글싱글, 밝은 얼굴과 예의 바른 태도로 싱싱하게 펄떡거리고 있었다. 작가는 관객에게 "다양한 공상 세계를 펼쳐보세요", "다양한 상상을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작가의 정신세계는 언젠가 이뤄질 인류의 멸종조차도 긍정적인 태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예견할 수 있는 상황들을 예술적으로 보여주어 여러 생각을 나누는 장을 만들고, 그 긍정적 결말에 대한 여러 상상을 즐기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날, 990원 작품을 구매하려면 QR코드를 통해서 접속하라는 지시문 같은 것들만 봐도 그렇다. 멸종의 징후로도 보는 기술진보의 혜택을 오히려 즐겨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작가는 멸종의 위험신호 속에서도 그 위험에 비관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상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마음껏 자신만의 관점을 펼치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전시장면
 전시장면
ⓒ 이혁발

관련사진보기

 
'멸종'과 '즐거운 상상'이 교차 편집되는 작가의 예술세계는 '무목적의 예술'이라는 예술작품의 본령 속에 있는 것이다. 즐겁게 놀이처럼 동참하며 마음껏 상상하며 작품 감상하라는 것은 작가도 그렇게 작품을 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놀이처럼 즐겁게 예술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호모루덴스(놀이의 인간)가 가지는 최고의 놀이가 예술인데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에게 창작에서 오는 쾌감은 기본이고, 전시되고 나서 그 작품을 보는 관객들이 그 예술이 주는 쾌감을 함께 나누고 공감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 또한 매우 클 것이다. 반향이 있는 작품은 혼자만의 놀이, 자맥질 같은 예술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백보림 작가는 작품 제작과 발표과정의 두 가지 쾌감을 동시에 누리는, 즉 금전적 욕망에서 벗어난 숭고한 예술 놀이에 푹 빠져 있었다.

태그:#백보림, #설치미술, #행위미술, #복합문화예술공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회화, 행위미술, 설치미술, 사진작업을 하며 안동에서 살고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