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가 가장 좋아하던 프로그램은 무한도전도, 1박 2일도 아니었다. 바로 해피투게더의 '프렌즈'였다. 연락이 끊긴 옛 친구를 수소문해 방송에서 만나게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떨리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반갑다, 친구야!"를 외치던 출연자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방송을 보고 난 다음날이면 친구들과 다짐했었다. "우리 커서 유명해지면 꼭 프렌즈에 나와서 찾아주기야." 막상 어른이 된 지금, 이 약속은 지키기 어렵게 됐다. 이젠 마음만 먹으면 쉽게 근황을 찾아볼 수 있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프렌즈'같은 방송은 앞으로도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수많은 SNS가 발달했다. 너무나 가늘면서도 끊어지지는 않는 우정의 실. 요즘 20대, MZ세대가 온라인을 통해 소통하는 법과 친구 관계에 대해 알아본다.
청년층이 전화를 피한다는 말이 있다. 오죽하면 '전화공포증'이라는 단어도 있다. 나도 비대면 소통이 가능한 문자나 DM(인스타그램 전용 다이렉트 메시지)이 좋다. 전화처럼 바로 대답할 필요도, 자리를 뜰 필요도 없어서다.
사실 처음 '전화공포증'이란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성질 급한 나는 전화를 곧잘 하고, 낯을 가리는 엄마아빠가 문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대 문제라기보다는 개인 성격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생각이 바뀌었다.
두 달 간 같이 일했어도 목소리를 모른다
회사에서 대학생 현장실습 프로그램을 열었는데 내가 면접 담당자여서, 지원서를 낸 학생들에게 연락했다. 그런데 열에 셋은 서너 번을 전화해도 받지 않는다. 대신 조금 뒤 문자가 온다. "누구세요?" 회사 소개를 문자로 남기니 그제야 전화로 사과한다. 나중에 말하길, 모르는 번호를 잘 받지 않는단다.
또 한 번은 지인의 소개로 거래처 신입과 연락할 때였다. 그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직원이었는데, 공연에 쓸 소품이 망가져 다시 제작해 줄 업체를 찾고 있었다. 도면을 새로 그리고 제작하는 등 약 두 달 정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수없이 피드백이 오고 갔다. 그 프로젝트를 끝내고 나니 놀라운 점이 보인다.
두 달이나 함께 일했는데도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모른다! 우리는 항상 카카오톡 메신저으로 작업물을 주고받았다. 답장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기 때문에, 서로 불편한 점을 몰랐다. 이쯤이면 사회가 정말 바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며 내가 놀란 점은 세대 차이, 거리감 등이 아니라 '전화 없이도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생각해 보면 나도 업무가 아닌 일반 상황에서는 온라인을 기본값으로 해 소통하는 때가 많다. 카톡이나 인스타그램은 물론이고, 취미생활을 할 때도 그렇다.
코로나 시즌에 유행한 게임이 있다. 바로 '어몽 어스(Among Us)'다. 우주선에 들어온 스파이를 찾는 PC게임이다. 자가격리 등으로 한가해진 찰나를 틈타 나도 게임을 깔아봤다. 그런데 이 게임은 특이한 요소가 하나 있다. 바로 유저 대부분이 디스코드(Discord)라는 플랫폼을 통해서 음성채팅을 한다는 점이다. 빠른 속도감과 눈치, 말투의 변화 등으로 범인을 색출해 낼 수 있기 때문에 진정한 재미를 위해선 빠질 수 없다.
이전까지 음성채팅을 해본 적이 없던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어몽어스를 포함해 각종 온라인 게임을 섭렵한 동창에게 도움을 구했다. 그가 내게 음성채팅 초대장을 하나 보내준다. 링크를 누르자 10명가량의 사람들이 접속한 채팅방에 들어가진다. 그들은 내 친구와 구면인 듯 편하게 안부를 물었다.
나도 오프라인에서 사람을 만나듯 모니터에 대고 꾸벅 인사를 한다. 몇 번 게임을 하다 보니, 내 얼굴이 보이지 않고, 언제든 자리를 피해도 된다는 안도감이 나를 편하게 만들어줬다. 그전까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음성채팅을 즐기는 줄 몰랐다. 풍월량, 녹두로 등 게임 스트리머들이 대중적으로 유명해지고, 별도 마이크 없이도 스마트폰으로 음성 채팅이 가능해진 게 진입장벽을 낮춘 듯했다.
음성채팅에 빠진 난 다른 게임도 모색했다. 돈 스타브(Don't Starve)라는 역시 속도감과 협동이 중요한 2인용 게임이다. 마침 코로나 때문에 약속을 계속 미뤄야 했던 또 다른 동창이 생각나 카톡으로 그를 꼬셨다. 친구가 게임창에 들어온다. 우리는 게임을 하면서 그간 못 나눴던 일상 수다도 함께 떤다.
거의 매일 밤 2시간 동안 이 일을 반복했다. 코로나가 어느 정도 끝난 이후, 근 2년 만에 친구를 실물로 만났다. 그런데도 우린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공간이 온라인일 뿐, 엄연히 말하면 어제도 본 사이니까.
업무는 카톡, 대화는 DM, 정보는 SNS
MZ세대는 각 소통수단마다 '성격'을 부여한다. 업무는 카톡으로, 일상대화는 DM으로, 정보를 찾기 위해선 트위터나 커뮤니티로. 타당한 이유도 있다. 카톡은 번호만 있으면 무분별하게 친구 등록이 된다. 이 때문에 내 사생활을 마음 편히 올리거나 집단별로 분류하기 쉽지 않다.
반면 인스타는 적어도 친구를 가려 받거나 비공개 계정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적인 대화를 하기 더 편하다. 커뮤니티에서도 쉽게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익명으로 취미 활동을 한다. 마음이 맞으면 소위 말하는 '덕친(덕질을 함께 하는 친구)'을 사귈 수도 있다. 청년들은 온라인 공간 속에서 관계를 분류하고 골라내고, 다시 담는다.
때로는 깍쟁이라는 오해를 받는 MZ세대. 어쩌면 우리는 온라인에서도 '내 방'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부모님도, 친척들도, 회사 동료들도 허락 없인 들어올 수 없는 개인적인 공간말이다. 너무나 개방된 시대 속에서 사생활이 보장받길 원한다.
내 방을 만들어달라며 떼쓰던 어릴 적의 내가 생각난다. 방이 있는 건 중요했지만, 정작 그렇게 원하던 내 방이 생긴 뒤에 난 문을 한 번도 닫지 않았다.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하면서도 고개를 쭉 빼서 거실에 앉아있는 아빠를 쳐다보곤 했다. 이 정도 거리감이면 되었다. 지금 SNS도 마찬가지, 문을 열어둔 느낌으로 사용하곤 한다.
아! 글을 쓰다 보니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있다. 난 이미 '프렌즈'에 출연한 적이 있다. 작년 동창에게 DM을 받았었다. 고등학교 때 더 친해지고 싶었지만 수능 때문에 연락이 흐지부지 됐던 친구다.
그의 DM이 물꼬가 되어 우리는 10년 만에 오프라인에서 만나 처음으로 길게 대화를 나눴고, 지금은 일주일에 세 번 이상 보는 친구가 됐다. 주변 지인들은 우리 둘이 원래 친했냐고 물어본다. 난 대답한다. "얼마 전에 DM이 와서 친해졌어."
친구들은 신기해하면서도,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 정도면 진짜 방송 출연은 못 했더라도 거기 나가고 싶었던 이유는 이룬 것 아닐까? "반갑다, 친구야!"를 목소리가 아닌 텍스트로 전한다. 기쁨은 흩어지지 않고 기록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