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기념비가 세워질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안 된 듯한데 제막식 뉴스를 보게 되었다. 그것도 한국전이 시작된 6월 초입에. 내가 사는 맨해튼 동쪽의 섬 롱아일랜드에는 나소와 서폭이라는 두 개의 군(County, 행정구역)이 있다.
나소에도, 서폭에도 한국전 참전을 기념하는 터가 있지만, 이번에 서폭 카운티의 한국전 기념 광장에 기념비가 또 하나 세워진 것이다. 식을 줄 모르는 여름 볕을 뚫고 제막식이 있었던 기념 광장(Hauppauge, Suffolk County)으로 제법 먼 길을 달려가 보았다.
국가와 사회가 용사를 기억속에 새기도록 하는 방법
롱아일랜드에는 6천 5백여 명의 한국전 참전용사가 계신다(2022년 인구조사국 자료). 6월이 되면 뜻있는 한인교회와 협회를 중심으로 참전용사와 가족을 위한 감사의 자리가 여럿 마련된다. 공식 석상이나 현충일 퍼래이드에 하늘색 정장을 깔끔하게 입고 나오시는 참전용사 분들의 모습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수년 전만 해도 우리 타운의 현충일(Memorial Day) 퍼레이드에서 꽤 여러분이 '한국전 참전 용사' 베너와 함께 당당하게 함께 행진하셨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행진 대열이 없어지더니 이제는 소수의 분만 차량에 앉아 참여 하신다. 포화를 이겨낸 분들도 세월은 이길 수가 없나보다.
용사들이 사라지면, 그들의 헌신도 사라지고 마는 걸까. 우리 집에서 자동차로 반경 10분 거리 이내에 참전 용사와 관련된 시설물을 꼽아 보았다. 8개 정도 된다.
참전 용사의 길로 명명된 거리도 다섯 개 정도 되는데 구석진 짧은 골목길이 아니라 4차선 대로로 뻗은 큰길과 타운을 잇는 중요 길목에 있다. 특히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 도로는 롱아일랜드 최대 공원인 아이젠하워파크와 나소 콜로세움이라는 대형 경기장 곁이라 눈에 특히 잘 들어온다.
공립 도서관과 아이젠하워파크 내 현충원을 제외하면 공공 기관 단지 안에 세워진 시설물은 없다. 그저 주민들이 지나다니는 일상 공간에 참전 용사 기념물들이 당연한 듯 함께 한다.
참전용사 기념 대로(Veterans Memorial Hwy)를 열심히 달려와 공원에 도착했다. 근처에 차량 관리공단이 있어 넓은 주차장을 사용할 수 있어 좋았다. 아담하고 정갈하게 잘 정비된 터를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2차 세계대전 참전 조형물이 먼저 보였다.
미국 곳곳에서 만난 세계대전 참전 기념 공원은 주요 부대나 전투를 각각의 기둥에 새겨 분수처럼 둥글게 조성한 곳을 자주 봐왔다. 반면 들렀던 한국전 참전 기념 공원에는 실물 모양의 전투 대원 동상이 있었다.
워싱턴 D.C.의 한국전 참전 기념 공원이 대표적이다. 상징적인 특이한 조형물보다는 실물에 가까운 용사의 동상이 전투원을 '한 사람'으로 살갑게 보게 했다. 검은 비석에 이름만 빼곡히 쓰인 베트남전 참전 기념비보다, 참전 용사들의 얼굴이 가득 새겨진 한국전 기념비가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이곳 서폭 카운티의 메모리얼 파크에도 병사의 모습을 한 동상이 있다. 한국 지도 모형의 조형물도 나란히 서 있다. 지도 위에는 현재의 한국 지명이 아니라 한국전 당시 용사들이 부르던 방식으로 이름이 새겨져 있다. 부산도 'Pusan'으로, 세계 3대 동계전투라는 장진호 전투도 'Battle of Chosin'으로 말이다.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기념비는 기존 두 조형물을 마주 보고 세워졌다. 알지도 못했던 나라, 만나보지도 못한 한국인들을 공산주의로부터 구출하고자 나라의 부르심에 순응한 이들을 기린다고 쓰여 있다.
그랬다. 전에 만났던 한 참전용사 할아버지는, '나치와 싸운 것도 아니고 일본이나 소련과 싸운 것도 아니고 너는 대체 누구와 싸우다 온 거냐'라고 주변에서 묻더란다. 그만큼 한국은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고, 언론의 주목도 받지 못했고, 미국이 참전한 다른 전쟁에 비해 혹독했지만 짧았다. 돌아와서도 제대로 보상과 치료를 받지 못하고, 인정도 받지 못한 용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번 제막식에도 참여한 살 스칼라토 참전용사분은 몇 해전 지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환영 행사도 없이 전역증을 나눠주고 해산하는 게 끝이었다"고 한다.
미디어의 주목을 받던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에 가려져 버린 한국 전쟁
새 기념비 중간쯤에 포로의 옆얼굴로 된 POW-MIA 상징이 있다. POW는 전쟁 포로를 뜻하고, MIA는 실종 병사를 말한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 가족으로부터 시작된 POW-MIA 상징기는 미국 국기와 함께 게양되는 중요한 깃발이다.
포로의 얼굴 아래에는 '당신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Your Not Forgotten)'이라는 문구가 있다. 오늘따라 이 문구가 유난히 마음을 때린다. 맞은편에 서 있는 전투병의 동상 아래,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이라는 글과 POW-MIA가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할 수만 있다면, 'Forgotten' 단어 앞에 'Never'를 새기고 싶었다.
지도 앱을 찾아보니 이 작은 현충원의 이름만 올라와 있고, 사진 한 장, 리뷰 글 하나가 없었다. 아쉬움에 짧은 리뷰를 올렸다. 공원이 세워진 지 오래인데, 이제서야 첫 번째 리뷰가 생긴 셈이다.
애써 찾기는 어려운 위치지만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걸음하고, 리뷰로도 남기면 좋을 듯싶다. 용사나 가족분들이 미처 읽으시지 못한다 하더라도 다음에서 또 다음으로, 결코 잊혀지지 않을 희생에 대한 기억과 감사의 랜선 기념비가 될테니.
친구와 영화를 보러 나갔던 큰아이에게 카톡이 왔다. 걷다 보니 차로 지날 땐 그저 지나쳤던 표지판이 보이더라고.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 도로 표지판이었다. 마침 글을 쓰고 있었는데 꼭 맞는 사진을 보내줘 고맙다고 답톡을 했다.
친구가 코리아가 무슨 전쟁을 했었냐고 묻더란다. 이렇게 큰 표지판이 세워질 정도면 큰 희생이 있었겠네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라고 거리와 길목에 기념물을 만들어 두는 것일 테다.
미국에도 지도자의 동상이 많이 있다. 기념 공원도, 길 이름에도 그들의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공원과 길 위에 이름을 다 헤아려 부를 수 없는 영웅들을 기린다. 실제 전투에서 생명을 주고 자유를 얻어낸 무명의 용사들이, 결코 무명으로 남지 않도록 하려는 노력이다. '나라의 부름에 순응'한 그들을 70년이 지나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새로 또 새기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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