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해바라기 꽃을 '태양의 꽃(sunflower)'이라 부른다. 그 이유는 '해를 닮은 모양'과 '해를 따라 움직이는 꽃'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노란 해바라기 꽃을 생각하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전 직장에서 퇴직하기 전 직원들과 함께 이젤을 펼쳐 놓고 해바라기 그림을 한 점씩 그린 적이 있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퇴직한 후에도 해바라기 그림을 보면 스치듯 서로를 떠올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유화를 그려 본다는 직원들은 저마다 해바라기 한 두 송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틈틈이 그린 그림은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직접 그렸다는 성취감으로 직원들의 표정이 해바라기처럼 환해졌다. 시골집 마당가에 자라던 해바라기를 보고 자란 나는 그림도, 사진도 해바라기만 있으면 어디든 달려갔다.
함안 강주리 해바라기 축제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뒤 곧바로 친구들과 축제장을 향해 출발했다. 이름도 생소한 함안군은 난생처음 가보는 곳으로 군산에서 자동차로 2시간 30분 이상 소요되는 거리이다.
법수중학교 앞 공용주차장에 주차를 한 뒤 한적한 시골 마을로 들어섰다. 세월이 비켜 간 강주리 마을, 오밀조밀한 골목이 끝나갈 무렵 6월의 풀냄새가 코끝을 벌름거리게 한다. 드디어 야트막한 언덕에 해바라기 꽃밭이 보인다.
그런데 이게 뭐지, 손바닥만 한 해바라기 꽃밭을 본 나는 내심 실망스런 생각이 스쳤다. 설마, 이정도 가지고 축제라고 하진 않겠지. 작년에 다녀왔다는 친구가 걱정 말라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12년 전 주민들이 만든 해바라기 축제
경상남도 함안군 강주리 오지 마을에 해바라기 꽃이 피게 된 것은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 주민들이 뜻을 모아 산등성을 일구고, 꽃을 피워낸 해바라기 축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난 6월 22일부터 오는 7월 14일까지 열린다는 강주리 해바라기 축제장, 매년 7월에는 전통과 문화를 부흥시켜 보자는 취지로 축제 한마당도 함께 펼쳐진다. 입장료는 2000원으로 70세 이상만 무료이다.
간당간당 65세 무료는 아닐까, 내심 혜택을 기대했던 우리는 2000원을 내면서도 그래도 아직 젊어 다행이라며 씩 웃었다.
이곳 강주리 해바라기 마을에서는 해를 거듭할수록 언덕을 개간하고 품종을 개량하여 식재한 면적은 3,700㎡이다. 12년 전 발 벗고 나서서 꽃을 심었던 어른들도 세월을 비켜 갈 수는 없었다. 당시에는 모종을 옮겨 심으면 꽃의 품종이나 개화시기를 앞당길 수 있었단다. 어느새 주민들도 마을과 함께 나이가 들어 일손이 턱없이 부족하니 씨앗 파종으로 방법을 바꾸었다.
꽃을 볼 수 있는 기간은 15일에서 20일 정도이다. 신기한 것은 축제 기간에 사람들이 몰려와 꽃을 만지고 소란을 피우면 해바라기도 심한 스트레스를 겪게 되어 시들시들 죽게 된다는 게 이날 만난 주민의 설명이다. 사람들 방문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꽃들이 시들고 말았을까 생각하니 안타까워서 우리도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이날 무거운 비구름이 머리 위까지 내려와 후텁지근한 날씨였다. 동산에 올라 선 나는 갑자기 펼쳐진 노란 세상에 눈을 뜰 수 없었다. 수천 송이 해바라기 꽃이 끝없이 펼쳐진 광경에 숨이 멎는 듯했다. 아름다운 해바라기 꽃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바람 따라 파도를 타고 있었다. 내 마음도 구름 따라 꽃 속에서 요리조리 흔들렸다.
저 많은 꽃들을 누가 피웠을까. 바람일까 구름일까.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 언덕배기 해바라기 밭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해바라기 꽃의 얼굴이 모두 달랐다. 태양처럼 뜨거운 빨간 해바라기, 울퉁불퉁한 세상사를 이겨 낸 듯 한 네모 해바라기, 영원히 그대만을 사랑하겠노라며 해를 향한 해바라기···.
기어이 무거움을 견디지 못한 빗방울이 얼굴을 간질이며 떨어진다. 손에는 마을 입구에서 쥐어 준 우산이 있었지만 펼치지 않았다. 빨간 등대가 보이는 위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꽃 이랑에 깊이 들어 가 얼굴을 묻고 해바라기와 눈을 맞췄다. 그가 나에게 속삭인다. 이젠 쉬어가도 된다고, 조금만 더 덜어 내면 보인다고.
알알이 박힌 구슬 위로 빗방울이 앉았다. 해바라기가 내 속에 들어왔다. 윤보영 시인의 <해바라기>가 떠올랐다.
해바라기 / 윤보영
밤새 그립던 마음 감추다가
뒤돌아 본 해에게 들켜
고개 숙인 해바라기 앞에서
내 안의 그대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더 쫓아가야
그대가 볼까 하고
'태양의 꽃' 해바라기와의 속삭임도 빗줄기에 묻어둔 채 가벼워진 발길을 돌린다. 속이 꽉 찬 씨알들과 다음 해를 기약하면서.
강주리 주민들과 해바라기는 내 안에서 또 하나의 이야기로 자라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