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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전 작품인데 지금 봐도 세련됐다는 평을 받는 천계영의 만화 <오디션>, 그 시절 주인공과 비슷한 나이였던 중·고등학생 독자들이 애 아빠가 되어서야 완결 난 임재원의 <짱>.

그리고 한국에선 원작 만화보단 드라마로 더 잘 알려진 카미오 요코의 <꽃보다 남자>, 약 28년째 아직도 연재 중인 오다 에이치로의 <원피스>, 연재가 멈춰 아직도 결말을 알 수 없는 야자와 아이의 <나나(NANA)>까지. 1998년. 내 인생에 '만화책'이라는 세상이 펼쳐졌다. 수향이라는 친구 덕분이었다. 

틈만 나면 친구와 함께 향한 곳

갓 중학교를 입학해 새로 사귄 친구 수향은 자기가 사는 동네에 책방이 있다며 같이 가자 했다. 친구가 좋던 나는 책방보단 친구가 가자는 말에 끌려 친구네 동네로 향했다. '스피드 책방'. 노란색과 빨간색이 오묘하게 섞인 간판이 작고 기다란 건물 2층에 걸려있었다. 

처음 들어선 그곳의 모든 벽면은 책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고른 책을 쌓아두기에 널찍한 테이블과 오래 앉아있기에 적당히 폭신한 소파는 몇 시간이고 만화책으로 빠져들기에 제법 괜찮은 환경이었다. 소설과 문학전집, 에세이 등도 있었지만 친구가 향한 쪽은 만화책 코너였다. 만화책 서가는 로맨스, 학원물, 성장기를 그린 이야기 등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좀 더 극적으로 풀어내는 스토리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소파에 앉아 어색하게 펼쳤던 내 생애 첫 만화책에선 순식간에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가 흘러 눈물 닦기 바빴고, 그다음 책을 펼쳤을 땐 내가 주인공인양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고 있었다. 또 다른 책을 읽을 땐 비장한 각오로 상대편과 싸우는 주인공의 기세에 책을 꽉 쥐어 힘을 더하고 있었다.
 
 멈출 수 없는 만화책의 세계
멈출 수 없는 만화책의 세계 ⓒ pexels
 
틈만 나면 친구와 함께 책방으로 향했다. 하교 후 우리의 목적지는 대부분이 책방이었다. 그걸로도 해갈되지 않을 땐 주말에도 친구와 만났다. 한 권에 300원. 300원을 지불하면 적어도 1시간은 새로운 세상으로 빠져들었다. 신기한 맛에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내내 씹었던 커피껌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석처럼 몸이 끌려들어 가 무언가에 흠뻑 빠져들 수 있다는 걸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깨달았다. 

그렇게 성실히 출근도장을 찍던 책방 생활은 고등학교를 진학하며 강제종료 당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 3시간이 걸렸고, 밤 9시가 되어서야 야간자율학습이 끝났다. 친구와 내가 진학한 학교는 서로 정반대의 지역에 위치해 만나기 어려웠고, 내가 사는 동네나 학교 근처엔 책방이 한 군데도 없었다. 여러 가지 핑계들을 앞세우다 보니 샛길로 빠져 책방까지 갈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만화책의 세계는 점차 흐려졌고 십여 년 동안 멈춰있었다. 

그러다 성인이 된 후 우연히 포털사이트에서 웹툰을 보게 되었다. 웹툰은 스피드 책방을 온라인으로 고스란히 옮겨둔 거나 다름없었다.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었고 한 권에 300원이라는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웹툰의 특성상 대부분의 작품이 한 주에 한 편씩 연재되기에, 추가 결제가 필요한 '미리 보기'의 유혹만 참을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웹툰은 전철 위에서 보내는 길고 긴 20대 직장인의 출·퇴근길의 무료함을 달래주었다. 어떨 땐 그 짧은 한 편이 삶에 치여 가라앉은 기분을 잠시 달래주는 약이 되기도 했다. 요일별 연재 웹툰 리스트에서 한 작품씩 골라 아껴둔 사탕을 까먹듯 일주일을 기다려 요일마다 하나씩 열어보는 재미도 있었다. 오늘치의 마음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한 꽤 좋은 수단이 되었다.

우리의 일상에 너무나 익숙해진 웹툰이라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덧붙여 보자면 웹에서 만난 만화는 20여 년 전보다 훨씬 더 깊고 신박하고 과감해져 있었다. 책방에서 만화책을 보던 1998년을 떠올려보면, 웹툰은 소재 부분에선 폭넓은 상상력으로 스토리들이 그려져 감탄이 절로 나왔다.

사람이지만 도깨비 세상으로 들어가 펼쳐지는 이야기, 죽으면 이전의 기억을 갖고 계속 환생하는 이야기, 인간과 똑같이 생긴 로봇들이 인간 세계에서 공존하는 미래의 이야기, 인간이 곤충화 되는 이야기 등 이런 상상은 어떻게 하나 싶을 정도로 무얼 상상해도 그 이상의 전개로 이어졌다. 
 
 웹툰 <무빙> 포스터
웹툰 <무빙> 포스터 ⓒ 강풀 작가
   
<무빙>, <D.P>, <이번 생도 잘 부탁해>, <이두나>, <마스크걸>, <신과 함께>, <내부자들> 등 웹툰을 원작으로 제작한 드라마와 영화는 최근 작품부터 오래된 작품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십여 년 전엔 웹툰 중 한 두 작품씩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는 경우가 생겨나더니 이제는 인기 있는 웹툰의 드라마화, 영화화가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웹툰을 아예 보지 않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들도 이미 드라마나 영화로 웹툰을 간접경험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웹드라마 <무빙> 포스터
웹드라마 <무빙> 포스터 ⓒ disney+

그럼에도 여전히 만화책은 만화책이고, 웹툰은 웹툰이다. 삶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좋은 웹툰 작품들을 보면서도 엄지손가락으로 다음 장면을 보기 위해 스크롤을 올릴 때면 이따금씩 스피드 책방에서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보던 때가 떠올랐다.

스마트폰 속 환경에 맞게 한 컷씩 주어지는 웹툰과는 달리, 한 페이지 안에 여러 컷이 담긴 구성이어서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만화책의 구조 때문이었다. 한 장을 넘기면서 슬쩍 봐둔 다음 컷. 빨리 넘어가 그 내용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괜스레 더 설렜다고 해야 할까. 

요즘 같은 장마철이 되면 습기를 먹어 더 눅눅해지는 만화책의 촉감과 냄새가 그립다. 깔끔하고 쾌적한 요즘의 만화카페 말고 그때 그 책방이 그립다.

하굣길 친구와 이미 신이 난 마음 안고 책방으로 향하던 길, 거의 눕듯 기대앉아 보던 레자가죽을 씌운 소파, 주인 내외분이 나무 난로를 위에 포일로 감싸 구워주던 온기 가득했던 고구마, 쥐포와 천하장사 소시지를 꼭꼭 씹어가며 한 장면도 놓치기 싫어했던 스피드 책방에 앉아있던, 그 속에서 놀던 때가 많이 그립다.

#만화책#웹툰#웹툰원작#책방#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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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하늘, 나무, 들꽃. 자연의 위로가 최고의 피로회복제라 믿는 사람. 퍽퍽한 서울살이에서 유일한 위로였던 한강을 붙들고 살다, 시골로 터전을 옮긴 지 8년 차 시골사람. ‘사랑하고, 사랑받고’라는 인생 주제를 이마에 붙이고 살아가는 그냥 사람. 토끼 넷과 주어진 오늘을 살아가는 엄마 사람. 소박한 문장 한 줄을 쓸 때 희열을 느끼는,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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