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의 젊은 시절은 대부분 스승과 함께하는 생활이었다. 16세에 다시 그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과 벗삼았다. 스승의 두 아들 괴원과 이준을 비롯하여 이복·임규진·이인구·김평묵·박경수·유중교 등 뒷날 유학계의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었다.
17세에 심한 홍역을 앓았다. 완쾌하자 다시 스승 곁으로 달려가 <주서(朱書)>를 읽었다.
서기 1850년(19세) 2월에 화서 선생의 <잡저>를 붓으로 베껴 책으로 만드니, 이것이 곧 <설문습록(雪門拾錄)>이다. 4월에는 용문산 쌍계암에 나아가, 화서 선생이 주관하던 <존심명리(存心明理)>라는 네 글자를 큰 글씨로 써서 주다. 9월에는 홍천의 삼포에서 다시 <주자차의>를 즙보하는 일에 참가하다. (주석 1)
이 해에 그는 스승을 모시고 설악산을 유람하고, 당시 정경을 시로 읊었다.
들으니 동도의 승경은
설악이 가장 명산이라
멀리 선생을 모시고
산골 깊숙이 찾아왔도다. (주석 2)
1852년(20세) 10월에 청주 한씨와 혼례를 치렀다. 그리고 2년 후 고향인 포천 가체리로 돌아왔다. 떠난 지 19년 만의 귀향이었다. 가난이 숙명처럼 따라다녀서 직접 농사일을 하면서 부모를 봉양했다.
아무리 학문이 출중해도 과거를 통해 관직에 입신하지 못하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1854년 성균관에 들어가 경서를 공부하면서 과거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성균관 유생들이 보는 명경과(明鏡科)에 응시하여 발탁되었다.
6월에 승문원 부정자에 임명되고 이듬해 10월 성균관 전적. 1857년 순강원 수봉관, 1859년 8월 사헌부 지평, 12월 사간원 정언, 1860년 6월 이조정랑, 1862년 7월 충청도 신창현감, 1863년 7월 충청관찰사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고 퇴임.
1864년 2월 다시 전적에 임명, 4월 예조좌랑. 1865년 1월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다. 이때 6개조에 달하는 시무상소를 준비하다가 어머니의 위독으로 중지했다. 이때에 상소에서 건의하려 했던 개혁방안은 "언로를 열 것, 임금의 신체인 성중을 보존할 것, 임금의 학문인 성학에 힘쓸 것, 근검절약할 것, 만동묘를 복구할 것, 서양의 요기를 없앨 것 등 여섯 가지였다." (주석 3)
어머니가 1865년 9월에 돌아가시고 1868년에는 화서 선생이 운명하였다.
면암은 관직에 나간 직후부터 강직한 언행으로 명성을 남겼다. 그 가운데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면, 선조의 후궁 인빈김씨의 무덤인 순감원의 수봉관으로 재직할 때의 일이다. 어느 권세가가 불법으로 원소(園所)의 지경을 침범해서 장사를 지냈다.
면암은 즉시 이장할 것을 독촉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사건을 무마해달라는 예조판서의 서신을 가져와서 오히려 면암을 협박하였다. 이에 면암은 그 판서를 찾아가서 대의를 들어 그 불법성을 나무랐다.
그 판서는 매우 불쾌했지만 면암을 벌할 수는 없었다. 이에 면암은 원소를 지낸 사람을 투옥시켜 버렸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상주는 즉시 묘를 파내갔다. (주석 4)
면암은 관직에 나가면서 항상 스승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가 신창현감을 사직했다는 소식에 화서는 일신의 명리와 불의를 떨치고 현감직을 버린 제자의 행위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뒷날 화서의 신도비문을 지었다.(<면암집>, 민족문화추진회, 1982, 이후 <면암집> 표기)
아, 하늘이 이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지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은 치세와 난세가 없을 수 없는데, 혼란하면 하늘은 반드시 한 사람의 대인 군자를 내어 시대를 참작하여 혼란을 중지하는 기본을 마련하게 하였다.
주(周)의 말기에 공자가 출생하고, 송·명의 말기에 주자와 송자가 태어난 것이 바로 그 징험이다. 그후 서교가 횡행하여 천하가 번복되고 생민이 어육이 되는 재앙이 있게 되니, 하늘은 우리 선생을 동방에 탄생시켜 저들을 물리치는 일을 살아 만세에 일치(一治)의 기초가 되게 하였으니, 아.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한 연구가는 면암의 1차 출사와 관련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면암은 23세 때 명경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였으며, 24세 때 이후 성균관 전적을 거쳐,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이조 정랑에 올랐다. 30세 때 신창현감으로 나갔을 때는 백성을 위해 상관인 충청감사에게 항의하다가 이듬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32세부터 다시 벼슬에 나가서 예조좌랑을 거쳐 34세(1866)에는 사헌부 지평으로 당시 대원군의 집정 초기에 훼철된 황조(만동묘)의 회복을 요구하였으며, 천주교가 성행하여 병인 교옥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서양의 요기를 제거할 것을 주장하는 등 여섯 가지 일을 건의하는 상소문을 지었으나 모친의 병환이 위중하여 올리지 못하였다. 이때 그는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에서 거상하였는데, 그 해에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가 발생하여 스승 화서는 강경한 척화의지를 천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주석 5)
주석
1> 최창규, <면암 최익현 선생 해적이>, <나라사랑>, 제6집, 21~22쪽, 외솔회,1972.
2> 박민영, 앞의 책, 18쪽.
3> 앞의 책, 24쪽.
4> 앞의 책, 21쪽.
5> 금장태, 앞의 책, 21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