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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창주조장의 황국신민서사비
해창주조장의 황국신민서사비 ⓒ 완도신문

인근 지역에는 정체불명의 모임단체가 있습니다. 단체명은 '결의친목회'라고 합니다. 그들이 결의한 것이 무엇인지 일반인들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역 사회 유지들로 이뤄진 이 단체의 성향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수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결의친목이라니 그들은 서로 간에 무엇을 결의 했던 것일까요? 그 뜻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들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 터를 닦고 경제행위를 했던 일본인들과의 관련성이 큽니다. 

우리나라를 침탈했던 일본은 각 지역에 상권을 형성하고 부를 축척했습니다. 특히 항만이 형성된 지역을 선정해 인근의 곡창지대, 어촌의 김과 같은 해조류가 풍부한 지역은 그들의 주 타깃이 됐습니다.

3백 1흑

'3백 1흑'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쌀, 면화, 소금이 세 가지 하얀 것 '3白(3백)'이라면 요즘 검은 반도체로 불리는 김(해태)은 한 가지 검은 것 '1黑(1흑)'입니다. 일본인들이 수탈한 주요 품목들이죠. 그들은 토지수탈과 함께 광물자원, 산림자원, 어장관리를 위해 전 국토를 짓밟았습니다. 일본인들은 수탈 품목을 정해 놓고 요소요소에 일본인 회사를 설립했죠.

특히, 전남지방의 토지수탈에 한 축을 담당했던 조선실업은 인근 해남에도 관리소를 뒀고 완도군에도 관리소를 뒀을 것입니다. 그 회사에 곡식을 유통했던 곳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명품 막걸리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해창주조장입니다. 그곳 정원에서 7년 전 '황국신민서사비'가 발견됐습니다. 1930년대 일제가 조선인들에게 암송을 강요한 천황에 대한 맹세문입니다.

적산가옥이 형태를 그대로 간직한 해창주조장의 본신은 미곡상입니다. 창립주 '시바타 히코헤이'는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일본을 오가며 미곡상을 했습니다. 따라서 조선실업의 농장에서 거둬들인 벼의 도정(搗精)을 맡았고, 이러한 수고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빗돌을 전달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농업자본들은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부터 목포에 본격적으로 진출합니다. 목포에 진출하기 시작한 일본의 농업회사들은 1912년 농업에 관한 정보를 교환한다는 취지로 목포농담회(木浦農談會)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1920년 당시 목포농담회의 회원은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 목포지점, 조선실업주식회사 목포지점, 가마타(鎌田)산업주식회사 목포지점, 조선흥업주식회사 목포관리소, 합명회사 쿠니타케(國武)농장, 후쿠다(福田)농사주식회사, 목포식산주식회사, 도쿠다(德田)양행 목포지점 등 8개 회사였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회사는 동척이었으며, 다음이 조선실업, 조선흥업, 도쿠다양행, 가마타산업 등의 순입니다. 이들 8개 회사가 소유한 토지는 모두 2만 정보(1정보는 3000평)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었습니다. 참고로 조선농회(朝鮮農會)에서 발간한 '조선농업발달사'에 따르면 1933년에 300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 숫자가 조선인은 43명인데 비해 일본인은 192명이나 돼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완도읍의 적산가옥이 의미하는 것

식민지 조선에 공장을 세울 정도로 자본주의 체계를 확립하지 못했던 일본은 토지와 농산물과 어업권을 수탈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제가 1910년부터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던 이유도 토지를 강탈하기 위해서였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사실상 일본 정부 소유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입니다. 동척은 1930년대 들어 41만 정보의 토지에 50여만 석의 쌀을 수확하는 전국 최대 규모의 농장이자 식민지 조선의 최대 회사가 됐습니다.

그 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총독부와 결탁한 일부 일본인들도 실업이니 흥업과 같은 요상한 이름으로 농토와 어장 획득에 나섭니다. 그 결과 1920년대 초반에 이미 1천 정보 이상의 농지를 소유한 조선실업, 조선흥업, 불이(不二)흥업(불이농장), 구마모토(熊本)농장, 사이토(齋藤)농장과 같은 기업형 농장이 전국 각지에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완도군도 예외는 아닙니다. 청산도를 비롯한 완도읍에도 적산가옥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 증거가 명백합니다. 조국 광복을 맞이하자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무진 애를 씁니다. 그래서 재산을 맡아 운영할 조선인을 섭외하기 시작했던 것인데...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정지승씨는 문화예술활동가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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