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기자말] |
역사는 기록이다. 이로부터 역사가의 시선은 대체로 왕조 교체나 전쟁, 권력 다툼이나 왕의 행적 등에 잇닿았다. 이를 주류로 인식하며 역사 발전의 증거라고 강제해 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름 없이 스러져간 민중의 손으로 이끌어간 게 대부분이다. 단지 여러 이유로 기록되지 못했을 뿐이다. 이들의 희생으로 역사 발전과 인본주의가 싹터 왔음을 인식해야 하는 건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인권이 신장하였고 여성이 참정권을 쟁취했으며, 공정한 재판이 가능한 체제가 성립되었다. 더는 권력의 폭압에 벌벌 떨지 않아도 되었다. 이런 바탕엔 기록되지 못한 민중의 수많은 저항과 희생이 있었다. 어느 위정자든 제 권력을 순순히 내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역사는 민중의 가슴에 자리한 셀 수 없는 무덤에 빚을 지며 변해왔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우금티에서 희생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의식하건 아니건 변치 않는 역사가 되었다.
동학정신 이용하려던 독재 정권
우금티는 '소를 끌고 넘지 말라'는 험한 고개다. 1970년대 도로를 내면서 높다란 고개가 깎인다. 그도 부족했던지 더 깎아낸 고개 밑으로 널따란 터널을 뚫어 버렸다. 낮아진 고개만큼이나, 민족사에 다시없을 위대한 항쟁인 동학혁명의 기억이 점차 희미해져 가는 느낌이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130년 전 수만 명 농민군이 목숨까지 버려가며 만들고자 했던 세상이 우금티 고갯마루에 묻혀 있다. 이를 대변하듯 고개 안쪽에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서 있다. 정읍 황토현 탑보다 10년 늦은 1973년에 세워졌음에도 관리에 그다지 공들이지 않았는지, 탑은 쇠락한 모습이다.
개탄스러운 건 공주와 정읍 두 탑 모두 우리 현대사의 수치인 박정희 손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쿠데타 합리화 도구로 동학혁명을 사용하고 서슴없이 폄훼했다.
우금티 탑에 '동학혁명군의 순국 정신이 5·16으로 이어지고 10월 유신의 바탕이 되었다' 새긴 글에서 그 의도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민중은 역시 현명하다. 누군가 그 위 독재자의 이름과 5·16과 10월 유신이라는 글자를 다 쪼아내 버렸다.
우금티로 대표되는 공주전투는 여기가 전부가 아니다. 전투 초기에는 공주 동남쪽의 봉화대와 능티에서 상호 밀고 밀리는 치열한 대규모 공방전이 벌어진다. 1차 접전이다. 화력 열세를 만회하고자 혁명군이 일시 후퇴하여 며칠 짧은 휴식 후, 2차 접전이 우금티에서 벌어진다.
능티 부근 물안주골과 서당골, 우금티 부근 성황당이와 하선다리는 피아간의 거대한 무덤인 셈이다. 곰나루 가까운 송장배미도 마찬가지다.
우금티 아래 주미동은 지방 소도시 외곽의 전형이다. 130년 전 피비린내 진동하는 아우성이, 웅~웅~ 거리며 힘겹게 우금티를 넘으려는 바람에 실려 아득하고도 세차게 밀려들고 있었다.
공주를 향해 모여든 세력
일본군이 지휘하는 연합군이 10월 20일(음) 수많은 탄약과 보급품을 싣고 금강을 건너와 공주에 진을 친다. 논산 대도소는 아차 싶었다. 이제 더는 김개남의 움직임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이미 전술·전략에서 커다란 실기를 했다. 강을 앞에 두고, 험한 산세를 활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 공주를 앉아서 빼앗겨버린 격이기 때문이다.
전봉준은 논산에서 노성으로 진을 옮기며 차분하게 공주 공격계획을 제시한다. 각 부대 지휘자에게 공주의 지형·지세를 설명하고 공격요충지와 부대 배치를 설명한다.
육로를 통해 공주로 향하는 길은 두 곳이다. 둘 다 고개다. 동쪽 효포 벌판에서 월성산 봉화대 고개인 능티를 넘어 물안주골로 드는 길이 하나다.
서남쪽 우금티가 둘이다. 그 아래 태봉산과 건지산이 요충지다. 우금티에서 곰나루 방향으로 두리봉이 막아섰고 한 가닥이 뻗어 일락산과 봉황산으로 이어지며 봉황산 아래가 충청감영이다. 두 고개 사이에 지막곡산-주미산-철마산이 솟아 골 안으로 금학동을 품고 있다.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봉화대와 물안주골, 금학동을 선점하는 게 승리의 관건이다. 또한 보급로로써 삼남 대로를 확실하게 장악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화력 열세를 만회하는 방안은 지형을 활용한 은폐·엄폐가 유일하다. 당시 일본군 개인화기는 미제 스나이더 소총이나 무라타 연발총이다. 화승총에 비할 무기가 아니다.
부대 배치가 이뤄진다. 선봉군은 효포에 진을 치고 봉화산 능티를 목표로, 좌익군은 이인에서 북접과 호응하며 우금티를 견제하고, 중군은 경천에 진을 치고 능동적으로 상황에 대처하기로 한다.
그때 충청감사 박제순이 공주 백성을 공산성에 몰아넣고, 성벽 위에 늘여 세워 방패로 삼는다. 혁명군의 기습공격에 대비한다고 부린 잔꾀다.
봉준은 공주의 경천에 진을 쳤는데 감영과의 거리가 삼십 리 정도였다. 이때 충청감사 박제순은 감영 내의 아전과 백성들을 이끌고 쌍수 산성에 들어가 보호하고 있었다 …(중략)… 제순은 감영을 비워두고 산성으로 피하여 허약한 듯한 모습을 내보여서 적을 유인코자 하였다. 한편으론 몰래 대포를 매설해 놓고 적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번역 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5, p275)
동학혁명군도 갖은 방법으로 공주를 기습 공격할 길을 모색하나, 공주 백성의 목숨을 담보로 방어 작전을 펴고 있는 조·일 연합군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대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는 시월 보름 즈음이라. 논산을 중심으로 모여든 각지 동학군들은 차례로 행진하여 북으로 공주성을 향하여 들어간다. 좌편으로는 이인역에 들어가고 우편으로는 노성읍을 거쳐 무넘이 고개를 넘어 효포 길로 들어섰다. 동학군의 형세는 참 굉장하였다. 두 길로 나누어 들어가는 군사는 논산서 공주까지의 산과 들에 동학군 천지가 되고 말았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52 의역)
10월 23일(음) 이인역 인근에 안성부사 성하영과 장위영 참모 구완희, 일본군 스즈키 소대 등 500여 명이 매복하고 있었다. 혁명군의 우금티 방향 진군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순무사 신정희와 선봉장 이규태와 충청감사 박제순과 서산군수 성하영과 참모장 구완희와 영관 이진호와 죽산부사 이두황과 대관 이겸제 등이 다수의 군병을 거느렸었다. 이때 동학군 부대는 이인역에서 성하영 부대를 만나 싸워 격파하고 그 길로 바로 공주 감영 뒷산인 봉황산을 에워쌌다. (앞의 책. p252 의역)
이들이 삼면에서 혁명군을 공격한다. 그러나 고지대에서 격렬하게 반격해 오는 혁명군을 막지 못한다. 사망 120여, 부상 3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부리나케 퇴각한다. 작은 승리였지만 첫 전투에서 동학혁명군은 값진 승리를 거뒀다. 빼앗은 총으로 화력을 보강한다. 사기는 더없이 높아졌다.
작은 승리 그 뒤, 전쟁의 서막
첫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혁명군은 효포에서 봉화산과 능티를 공격하기로 한다. 이때는 일본군 후비 보병 제19대대 소속 모리오가 이끄는 2중대도 공주에 도착,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선봉은 송희옥 부대가 맡고, 유한필 부대는 좌익을 맡아 우금티 남쪽 주미·태봉동에 진을 치고, 중군은 북접이 맡아 우금티와 이인 중간지점인 주봉리에서 견제하기로 했다.
점심 무렵 관군이 효포에 내려와 있었다. 정탐으로 이를 파악한 선봉대가 23일 오후, 공격을 개시한다. 전투가 시작되자 조·일 연합군이 봉화산 능티로 일제히 후퇴한다. 그 상태에서 무지막지한 반격이 이뤄진다.
막강한 화력 배치로 능티 방어에 집중함으로써 쌍방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지루한 전투가 이틀을 넘겨 25일 새벽까지 이어진다. 화력이 열악한 혁명군은 1백여 사상자를 내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부대는 무넘이를 넘어 효포로 짓쳐 들어가니 관병이 또한 패하여 공주성으로 도망하는지라. 동학군은 승세를 얻어 바로 공주성을 향하여 들어가니 관병들은 죽기로써 막는지라. 이곳에서 여러 날을 두고 서로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아니하고 양군 사상은 각기 수천 명에 이르렀다. (앞의 책. p252~253 의역)
이즈음 북접 영동·옥천 부대가 금강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일본군에게 밀려 대교천으로 밀려난다. 또한 천안 목천의 세성산을 점령하고 있던 김복용이 이끌던 충청도 동학군이, 일본군과 이두황의 무지막지한 공격에 수백 명 사망자를 내며 대패해 버린다.
세성산 전투 패배로 전봉준은 크게 낙담한다. 공주를 점령해 천안으로 진격, 세성산을 거점으로 경기도와 한양을 공략하는 근거지로 활용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