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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자마자 알아챌 수 있었다. 드디어 기대하던 날이 왔다는 것을. 창문 틈으로 퍼지는 빗소리를 감상하며 온몸을 이불로 돌돌 감는다.

이런 날 일 안하고 집에 종일 머물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워하다가 때마침 계획 없는 휴일에 아침부터 비가 반갑게 내린다는 소식을 봤다. 느린 손짓으로 날씨를 확인하니 하루 종일 강수 확률 90%. 내일도 모레도 일기 예보에는 온통 회색 구름과 빗방울 그림이 차지한다. 아, 장마구나.

'난 비 오는 날이 좋아.'

어렸을 때부터 이런 내 고백에 온전히 화답해 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진득한 습기와 눅눅한 곰팡이 냄새, 젖은 머리카락과 양말까지. 여러 이유를 대며 비가 싫다고 말하는 친구의 이마는 새까만 비구름을 닮아 있었다.
 
 비(자료사진)
비(자료사진) ⓒ 픽사베이

그렇지만 비 오는 날에만 느껴지는 더 특별한 것도 있다고, 나는 속으로 말할 수밖에. 예를 들면 쏟아지는 빗방울 사이를 채우는 투명한 바람과 경쾌한 빗소리, 매끈해진 진녹색 나뭇잎이 가득한 거리 같은 것 말이다.

이토록 소중한 오늘을 어떻게 하면 더 알차게 보낼 수 있을까. 매일 컵볶이를 사 먹던 어린 시절에는 우산 없이 대문을 나와 장대비를 그대로 맞는 놀이를 즐기곤 했다. 폭포 속 수도승처럼 자유롭게 아무도 없는 집 앞 골목을 맴돌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산성비와 탈모가 두려워 부지런히 우산을 챙기고, 축축한 지하철 안에서 잔뜩 찡그리며 출근하는 직장인으로 커 버렸지만.

'장마'를 즐겁게 맞이하는 자세

간만의 주말, 종일 비 오는 날 정도는 이불 위에서 마냥 늘어져도 오늘만은 스스로를 너그럽게 봐주자. 햇빛을 받지 못해 세로토닌이 줄어들어 따라오는 울적함과 게으름은 장마와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니까. 

이럴 때엔 아주 사소한 일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예를 들어 잔잔한 재즈나 장작 타는 소리를 유튜브에서 재생하면, 내 방이 순식간에 벽난로 온기 가득한 오두막으로 변신하는 기분이다.
 
 책 읽기 좋은 시간
책 읽기 좋은 시간 ⓒ 조성하
 
그러다 괜히 내 주위를 조금 낯선 시선으로 둘러보게 된다. 눈을 돌려 보니 살짝 변한 벽지 색깔과 비뚤어진 선반을 관찰하다가 구석에 수북 쌓인 '책무덤'이 눈에 들어온다. 

언제 샀는지 기억조차 없는 두꺼운 책, 몇 주 전 욕심내 잔뜩 대출했다가 그대로 기한 연장만 한 책, 누군가 선물로 건네준 책들. '바빠서 도무지 읽을 시간이 없네'라는 궁색한 변명을 떨쳐내기에는 지금이 가장 완벽한 시간이다. 끊임없이 내리는 비 덕분에 적당히 무거워진 공간은 우리를 조용히 몰입의 길로 안내한다. 

빗소리가 연결해 준 마음 

차분히 책장을 넘겨가며 다른 세상에 빠져 있다가 문득 요즘 자주 만나지 못했던 얼굴들이 그리워졌다.

보통의 환한 낮이었다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비로 촉촉하게 젖은 공기가 마음도 적시는 건지, 서랍 바닥을 뒤져 갈색 바탕에 나뭇잎이 가득한 편지지와 볼펜을 꺼낸다. 누구에게 쓸까. 평소 딱딱한 공문과 보고서에 치여 키보드만 두드리다가, 펜을 쥐고 또박또박 글씨를 적으려니 제법 힘 조절이 낯설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에 손 편지를 쓴다. 

호흡이 긴 문장으로 편지를 쓰는 내내 상대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느낌이 좋다. 다양한 이모티콘으로 표정과 제스를 빠르게 던지는 메신저로는 맛볼 수 없는 진득함이다. 친구와 옆에 나란히 앉아 재잘대는 기분으로 한 줄씩 써 내려갔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장소와 대화 기억나?, 그때 음식이 진짜 맛있었는데. 요샌 일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어. 곧 다시 만나자.'
 
 빗소리와 함께 꼼꼼히 눌러담은 마음
빗소리와 함께 꼼꼼히 눌러담은 마음 ⓒ freepik
 
편지인지 일기인지 구분 어려울 잡담이 어느새 한 페이지 가득 채워지고, 그제야 잊고 있던 빗소리가 다시 귀에 들려온다. 혼자만의 고독한 하루가 될 줄 알았는데 신나게 수다 한바탕 끝내고 온 듯한 느낌이다. 

문득 노곤함이 밀려온다. 글씨를 쓰느라 그저 손가락이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편지를 받게 됐을 때의 표정을 상상하니 마음이 간지럽다. 여전히 비는 세차게 내리고 있다. 

전혀 당연하지 않은 오늘 

창밖으로 새하얗게 내리는 비를 구경하다가, 며칠 전 미리 사 두었던 수박 한 통이 떠올랐다. 장마가 지나면 당분간 맛있는 과일은 쉽게 볼 수 없으니 겨울을 대비하는 김장처럼 과일을 저장해 뒀었다. 커다란 수박을 냉장고에서 꺼내 빨간 과육만 잘라 담는다. 평소에는 귀찮은 일이지만 오늘은 왠지 경건하게 해낸다. 

마른장마, 지각 장마, 국지성 집중호우, 심지어 일각에서는 '장마'라는 단어 자체가 힘을 잃어 다시 정의해야 한다고 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이 지루한 장마마저 기후 위기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최근 충청 지방에는 200년 만에 내린 폭우로 인해 안타까운 인명 피해가 생겼다고 한다. 집 안에서 비와 함께하는 오늘이 당연히 주어지는 건 아니란 걸 기억해야겠다. 

이젠 예전처럼 명확한 기간도 아니라서, 오는 8월이나 9월에도 긴 우기가 올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매일의 꿉꿉함을 잘 견디는 것이겠다. 구석구석 재미를 찾아 마음을 밝혀 놓으면, 제습기를 틀지 않아도 보송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가끔 해가 말갛게 등장하는 날이면, 그동안 너무 보고 싶었다고 눈을 반짝이겠지. 그때까지 모두가 이 회색 날들을 무사히, 안전히 지나가시길.
 
 비로 젖은 카페 테라스
비로 젖은 카페 테라스 ⓒ 조성하
 

#장마#우기#비오는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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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문장들로 나를 설명하기 위해 여백의 시간을 즐기는 30대. 모든 가능성의 처음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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