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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종자는 오랫동안 농민들의 손에 의해 최소 30년 이상 이 땅에 심겨진 종자를 말한다. 매년 심겨지며 조금씩 그 땅의 생태계에 맞춰서 적응해 온 토종종자는 우리 삶의 터전과 유기적으로 공명하는 존재이자 농민들이 세대를 거듭하며 만들어낸 하나의 문화유산이다. 최근 유전자변형 농수산물(GMO)과 종자주권 등의 이유로 이미 많이 주목받은 토종종자가 이상기후로 인한 기후위기 속에서 다시 한 번 그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지역 풍토에 맞는 다양성 확보를 통해 병해충 및 환경변화에서 생존율이 뛰어난 토종농작물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함양군은 농업이 주요 생산기반인 지역으로 농업계획이 중요하다. 경상남도를 통해 함양군도 토종농산물 소득보전 직불제를 시행하고 있지만 저변확대에 한계가 있다. 농업 문화유산인 토종종자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토종종자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만든 토종종자 생태계를 알아보고 함양농업의 미래를 고민해본다. [기자말]
[글 싣는 순서]

1. 농업도시 함양의 토종종자 생태계는
2. 국내 토종종자운동의 중심, 토종씨드림 변현단 대표
3. 토종종자를 보급하는 씨앗도서관, 씨앗도서관협의회 박영재 대표
4. 고유한 유전정보를 보유한 야생콩 7천점 연구자, 정규화 교수
5. 토종쌀, 판매를 통해 지켜나가는 우보농장
6. 토종 제품부터 교육까지 활발하게, 제터먹이협동조합
7. 씨앗을 받는 텃밭에서 씨앗도서관 설립까지 홍성풀무학교 오도 교사
8. 거창의 작은 토종종자 생태계 형성 현황
9. 또다른 문화유산인 토종종자를 대하는 방법, 씨앗바람연구소 강나루 작가

 
 거창군여성농민회 신은정씨
거창군여성농민회 신은정씨 ⓒ 주간함양
 
"토종씨앗의 소득창출은 소득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지속가능성에 목적이 있다."

거창은 토종종자 생태계가 갖춰진 지역으로 평가받는다. 생태계라고 하면 순환과 지속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토종종자 생태계는 앞서 살펴본 다양한 지역의 우수사례들이 모두 한 지역에 나타나야만 가능하다. 토종씨앗의 중요성을 알고서 토종씨앗을 수집해야 하고, 토종씨앗 보존을 위해 작물에 따른 농사법도 파악해야 하고 주변으로 나누며 확산시키는 역할도 해야 한다. 씨앗의 가치는 작물로 나오기 때문에 토종씨앗을 요리로 이어주는 것 역시 중요하다. 안정적인 생태계를 위해서는 토종작물을 통한 소득 역시 창출되어야 하고 교육과 행사를 통해 문화적으로 토종씨앗의 가치를 퍼뜨리는 활동도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이 원활하게 진행될 때 토종종자 생태계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거창군의 사례는 거창군여성농민회(아래 거창여농)와 아날협동조합의 신은정씨를 중심으로 2015년부터 시작됐다. 대한민국에서 토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첫 발자국 2008년 토종씨드림이 시작될 때 한 축을 담당했던 것이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아래 전여농)이다. 전여농에서도 자체적으로 2011년 3월에 1회원 1토종씨앗 지킴이 발대식을 진행하는 등 네트워크를 구성해서 토종씨앗을 나눔하고 증식하는 노력을 이어왔다.

신은정씨는 2016년 고향인 거창으로 돌아와서 여농 활동을 이어가게 됐다. 그중에서도 식량주권 활동에 집중했는데 그런 관심이 토종씨앗으로 이어지게 됐다. 그렇게 신은정씨 중심으로 2017년 거창토종살림 동아리가 만들어지면서 토종씨앗 활동 발판이 마련됐다.

"그래서 2018년부터 토종씨앗 공부를 본격적으로 이어갔어요. 전여농을 통해 토종씨앗을 교류하는 수준이었는데 거창에도 토종씨앗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 지역에 있는 것들을 보존하고 발굴해 내는 것이 가장 우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수집 활동을 계획하게 됐어요."

그 시기 거창읍 중심지 활성화 사업을 기회 삼아 거창군 신원면을 중심으로 수집 활동을 시작했다. 토종씨앗 수집 활동을 위해 토종씨드림 변현단 대표를 통해 수집 매뉴얼을 전수받는 등 철저한 준비를 마쳤다.

씨앗이 많이 나올 것에 확신이 없었던 것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많은 자원이 쏟아졌다. 신원면 조사에서만 총 83점이 모였다.

수집번호를 매기고 원예작물과 식량작물을 구분했다. 분류와 작물명을 나눈 뒤 품종명을 기록했다. 보유년과 누구에게서 수집했는지까지 상세하게 기록했다. 메주콩, 늦마늘, 나물콩, 흰옥수수 등 모두 오랫동안 전승되며 용도나 모습, 색 등에 따라 부르던 이름이다.

그렇게 첫 번째 활동집이 만들어졌다. 수집한 작물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수집한 토종작물을 활용한 토종밥상과 요리법, 씨앗을 나눠준 할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활동집에서는 '갖가지 사연이 담긴 신원면에서 만난 씨앗들은 그 자체로 지역의 역사였습니다'라고 씨앗 수집 활동을 설명한다.

"씨앗 수집을 하면서 보유자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이야기를 듣는데 흘려듣고 말 이야기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씨앗을 수집할 때마다 들은 이야기를 전부 기록했어요. 수집을 나갈 때도 사진 담당, 인터뷰 담당 등 분업을 해서 수집 활동을 나갔죠."

할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작물에 대한 이야기였겠지만 삶의 이야기였다. 신원면 번득마을 지분조 할머니는 90대의 고령에 "농사지어 심어봐야 누가 먹냐"면서도 봉투마다 고이고이 토종씨앗을 나눠서 고장난 냉장고에 넣어뒀다. 지분조 할머니께서 60여년 전 산청 친정에 다녀오며 받아온 호박씨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이야기. 모두 활동지에 생생하게 담겨있다.

거창군 토종씨앗 전수조사

거창군은 12개 읍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원면에서 가능성을 확인한 거창토종살림은 거창 전체로 이 움직임을 확장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거창군 전수조사를 실시했어요. 그냥 대표마을만 대충 간 게 아니라 정말 구석구석 자연 마을과 가구수 몇 없는 골짜기까지 전부 들어가서 싹싹 훑었어요. 없으면 없는대로 살펴보고 사람이 있으면 꼭 이야기 나눠보고 그랬어요. 원래 2019년 마무리 예정이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일정이 자꾸 늦춰지다 결국 2020년도에 전수조사를 마무리 했어요."

거창국여성농민회 박정숙 회장은 "1, 2년 만 일찍 조사했으면 조금 더 많은 씨앗을 찾을 수 있었는데 몇 년 사이 손을 놓아버린 씨앗들이 있어 아쉬웠다"고 밝혔다.

토종은 소득작물로 이어지기 어렵다. 생산성을 중심으로 개량된 개량종보다 모양, 크기, 양에서 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종에는 다양한 맛과 모습이 있다. 소득을 중심으로 농사를 짓는 대농들은 진작 토종을 포기했지만 우리 가족 먹을 토종을 계속해서 이어온 것은 소농 중심의 농사였다. "장맛이 달라서 안된다"며 콩깍지가 터져 콩이 튀는데도 토종콩을 고집해 온 할머니들은 이제 물리적으로도 씨앗 받는 농사를 이어가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그 소멸의 순간에 거창군은 지역 전체 전수조사를 했다.

거창군의 전체를 전부 훑고 나서는 마음이 편안했다는 신은정씨. '일단 수집했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보람 있었어요. 거창의 씨앗을 전부 수집했다는 것도 있지만 거창 지역만의 특징을 가진 씨앗도 있고, 거창에서만 나온 씨앗도 있어서 전국적으로도 다양한 품종을 확보했다는 것에 가치가 있어요."

수집된 콩 중 물레콩이 있다. 주목적은 콩나물을 길러 먹는 용도다. 나물콩이라 부르기도, 질금콩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드물게 나오지만 거창에서는 오래전부터 많이 재배해오던 콩이다. 수집번호 190번, 180번 분홍하지감자도 특별하다. 분홍하지감자는 국내 유입된 감자 종류 중 굉장히 오래된 감자다. 이런 토종씨앗들은 검토를 통해 추려서 토종씨드림을 통해 유전자원센터로 일부, 토종씨드림 중간 보관 일부, 그리고 거창여농에서 현지 내 보존을 실시한다.

"저희가 수집한 게 총 295점이 돼요. 그런데 이걸 매년 농사할 수 없으니 일단 냉장, 냉동보관을 통해 씨앗 장기 보관을 해요. 일부는 해마다 품종을 선정해서 계속 살려내는 거죠. 씨앗의 활력이 살아있도록 연도별로 선정하는데요. 씨앗이 얼마 남지 않은 것, 할머니 연세가 많은 것 위주로 증식을 먼저 해요. 그다음으로는 지역에 나눌 수 있는 것들 위주로 해요. 보존도 중요하지만 나눔도 중요해요."

작물 증식은 거창여농이 운영하는 채종포(씨앗을 받는 밭)가 담당한다. 이때 작물의 특성 기록을 위한 사진촬영이 진행된다.

"저희는 도감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작물 사진까지 다 기록으로 남겼어요. 다른 지역을 보면 씨앗만 사진을 찍어서 도감을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씨앗만 봐서는 일반인들이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저희는 직접 재배하는 과정을 가지면서 어떤 작물인지 기록을 남긴 거죠. 웬만큼은 다 담은 것 같아요."

그렇게 만들어진 책은 <거창 토종씨앗 도감>으로 거창군과 거창여농이 중심이 되어 책을 만들었다. 씨앗의 크기와 작물의 모습, 특징이 되는 모습까지 전부 정리해서 품종별로 정리되어있다.

거창 토종씨앗 운동은 우수사례가 되어 함양, 거창, 남해, 고성 등 다양한 지역으로 가서 활동 내용을 공유하는 등 타 지역의 토종씨앗 운동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거창은 여농 조직도 있고 동아리도 있다보니 체계적으로 움직이기에 여건이 좋았어요. 하지만 다른 시골은 젊은 분도 잘 없고 활동하기가 쉽지 않은 면이 분명히 있어요. 농사 짓는 분들은 농사에 전념하기도 바쁘니까요. 거창의 사례는 회원분들이 다들 열정적으로 참여해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마지막 단추 소득창출

토종씨앗 농사가 진행된다고 해도 소득으로 이어지기까지는 굉장히 어렵다.

한살림 거창 매장 맞은 편에 위치한 카페 아날. 아날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카페다. 여기서는 토종팥으로 만든 팥라떼를 판매하고 있다.

"저희가 수집한 자원 중 '재팥'이 뛰어난 자원이더라고요. 그래서 재팥을 이용한 음료를 개발하는 등 소득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어요. 겨울엔 찐빵도 해요. 지금은 아직 시범 단계지만 다양한 제품 개발을 통해 토종작물이 소득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토종씨앗의 소득창출은 소득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지속가능성에 목적이 있다. 그런 맥락에서 경상남도에서 진행하는 '토종농산물 소득보전 직불제'에도 개편이 필요하다는 게 신은정씨의 의견이다.

"현 제도는 형식적인 거죠. 농민들이 10년 전, 혹은 50년 전부터 대물림해서 받은 씨앗이고 토종인데 증명할 길이 없죠. 경상남도 농업기술원에서 주는 씨앗을 받아야만 되는 거예요. 딱 선정된 품목만. 토종작물은 농협이 수매도 안 해줘요."

수입이 적은 것도 문제지만 아예 안 되는 건 더 큰 문제다. 토종씨앗을 경작하면서 큰 소득을 바라진 않지만 땀 흘려 경작한 토종작물이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 때 농민들은 허탈함을 느낀다. 농민들은 "농사지을 재미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저희가 토종씨앗 관련해서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고 실적도 있고 하니까 군에서도 많이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번엔 직불금 관련해서 이 제도를 개선해 보려고 해요. 토종 인증에 대해서도 이 지역에서 수집이 돼서 유전자원센터에 등록이 된 토종인데 허가가 안된다고 하면 문제가 있는 거죠. 어쨌든 최소한 유전자원센터에 등록이 되어서 고유번호를 부여받은 작물에 한해서는 직불금에 포함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예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함양뉴스 (최학수PD)에도 실렸습니다.


#함양 농업에 토종종자 생태계 마련하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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