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토박이였던 내가 제주를 떠나 온 지 어느덧 1년이 다 되어간다.
"얘들아, 우리 이사하는 게 아니야. 제주가 아닌 다른 곳으로 긴 여행을 떠나는 거야. 여행 떠날 준비 됐어?"
이삿짐을 싸고 나르고 제주에서의 생활을 정리하며 당시 아이들에게 해 주었던 말, 아니 실은 신령들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다.
제주는 1만 8000여 신들의 고장이기도 하다. 매년 이사철인 '신구간(新舊間)'이라는 풍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신구간(대한 후 5일부터~입춘 전 3일까지의 기간)이란, 지상에 사는 신들이 하늘로 올라가 자신의 임무를 부여받는 기간으로 신관과 구관이 교체되는 날을 말한다.
제주 토박이 사람들은 이사도 아무 때나 하지 않는다. 지상에 신들이 없는 신구간 때 해야 아무 탈 없이 지낼 수 있다고 여긴다(물론 이 풍습은 최근엔 많이 줄고 있긴 하다). 우리 부부는 제주 신령들이 이사하는 우릴 보고 행여나 노여워하면 어쩌나, 화 입히면 어쩌나 하는 염려와 두려움이 앞섰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실제론 신령들 들으란 의미로 '이사가 아니라 긴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 부부는 둘 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제주 토박이이다. 그런 우리가 도대체 무슨 결심을 했길래 40대 중반을 넘어 제주 탈출을 시도하고, 결국 제주를 떠나 생활하고 있는 것일까. 자연 속 카페를 운영하며 사는 '시골 로망'의 여유로운 삶을 꿈꿨으나, 실제 해보니 그게 쉽지는 않았다(관련 기사:
'3도 4촌' 이영자 집 보며 생각난 우리 가족 흑역사 https://omn.kr/29cx7 ).
실은 20여 년 전, 20대일 때도 '제주 탈출'을 시도했던 적이 있긴 했다. 아주 짧게였지만 좋아하는 방송작가 일을 해보겠다며 무작정 서울로 갔던 것이다. 그 뒤 제주지역 방송국 문을 두드리면서 방송작가로서의 본격 삶이 시작되었다. 이후 제주에서 일에 빠져 지내면서 나는 결심했었다.
"제주에서 뼈를 묻고 살아야지."
섬이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이었을까. 어린 시절엔 제주가 답답했다면, 어른이 돼 내가 좋아하는 방송작가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제주는 다르게 느껴졌다. 지친 내 삶에 위로와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혹독했던 방송일을 20년 이상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좋아했던 일이라는 것, 그게 제주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게 큰 이유였지 않나 싶다. 가까이에 부모님이 계시고 또 10분만 차를 타고 이동하면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곳.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삶, 아마도 이런 삶을 꿈꾸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제주 밖에서 본 제주, 제주 안에서 본 제주
제주 안에서도 그렇지만 막상 제주를 벗어나 보니 역시나 제주를 동경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제주를 나왔던 지난 2023년 8월 말까지도, 주변으로부터 제주가 참 좋다며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걸 자주 들었다.
내가 방송작가 시절 함께 일했던 상사 한 분은, 퇴임 뒤 제주에서 제2막 인생을 펼치기로 했다고 전화를 주시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삶의 터전으로, 제2의 인생 종착지로 여기겠다며 제주를 선택하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그런데 요즘 지금의 상황은 다른 듯 보인다.
제주지역의 인구감소가 빨라지고 있다는 지역 신문 기사가 눈길을 끈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SNS 영상 안에도 유독 '눈물의 제주도', '텅텅 비어 가는 제주', '제주살이 포기하는 이유' 등의 영상들이 내 눈앞에 자주 띄고 있다.
거기다 제주살이 열풍을 일으켰던 가수 이효리가 제주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올해 하반기에 서울로 이사 간다는 소식까지 들려온다. 왜 다들 제주를 떠나고 있는 것일까. 우리 가족은 왜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제주 탈출을 시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019년, 아닌 2020년까지만 해도 제주는 비교적 괜찮았다. 코로나 시기로 많은 이들이 제주를 찾고 제주 로망을 키워나갔던 그때.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우리 가족이 제주 땅을 알아보기 시작했던 2013년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싸고 저렴한 제주 땅, 제주 돌집들이 금세 팔려 나가는 경험에 우린 제주 부동산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런 현상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더는 오르지 않을 거라 여긴 제주의 집값, 땅값이 매년 쑥쑥 오름세를 이어갔다. 제주 인구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제주 안에서도 시내 도심지역과 시골 집값의 차이는 큰데, 그 시기엔 이주민들이 시골땅을 선호하는 분위기이다 보니 도심과 시골지역을 가리지 않고 제주 집값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제주의 '미친 집값',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 취업 걱정은 했어도 적어도 집세 걱정은 하지 않을 정도로 제주 집값이 저렴하고 안정적이었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10년 전, 2014년 무렵만 해도 제주 집값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제주 이주민들의 이주 선택도 바로 그 점 때문이지 않았을까. 높은 집세를 아낄 수 있다면 차라리 낮은 집세가 매력인 제주를 선택해, 건강한 제주 라이프를 즐기며 살아가겠다는 움직임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에 더해 당시 유명인 이효리의 제주살이, TV 예능 '효리네 민박' 등 효과가 작용했을 것이다. 지금은 한풀 꺾였지만, 예전의 제주살이는 공무원, 대기업, 공기업 등의 직장인이 아닌 이상 제주에서 일자리만 가질 수 있다면 문제 될 게 없는 꽤나 효율적인 선택에 속했다.
물론 제주는 지역 특성상 일자리도 제한적이고 월급 또한 다른 지역에 비해 낮은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낮은 집값과 자연환경은 사람들 발길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이랬던 제주였는데, 요즘 상황은 정반대다. 우리 부부가 육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알아보던 지난 2023년 6월 무렵에도 제주 아파트 가격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훌쩍 뛰어 있었다. 도대체 제주 아파트가 언제 서울 수도권 다음으로 높은 가격이 된 거냐며 의아해하는 이들이 많다.
제주 토박이로 살아가던 우리 가족들마저도 그걸 못 이기고 '제주 탈출'을 했을 정도니 말이다. 나는 이미 제주 안에서의 방송일이 다 정리되어 있었고, 남편 또한 제주에 있어야만 하는 직업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주가 아닌 새로운 곳에서의 2막 인생을 위해 제주 탈출을 선택했다.
그리고 10년 전 그때처럼, 집값이 저렴한 다른 지역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부분이 이 부분이다. 더불어 살아가기 불편한 점이 없게 생활 인프라가 잘 갖춰진 곳이길 바랐고, 또한 제주 못지않게 초록의 자연환경을 일상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곳이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연과 벗하는 순천살이도 좋네요
그 결과 우리가 현재 자리 잡은 곳은 전라남도 순천시다. 정원도시로 유명한 이곳 순천은 도심의 시민들 공간까지 정원의 일상을 만들어 나가려 노력하는 지방 소도시이다. 작년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대히트를 거두며 올해 역시 순천시를 찾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물론 제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순천에 또 다른 젠트리피케이션 효과를 가져오지는 않을까 우려되긴 한다. 하지만 걱정은 뒤로 하고 조금 더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 한다. 로컬리즘이 전해주는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기대해보려 한다.
요약하자면, 우리 가족은 지난 1여 년의 순천 생활에 꽤나 만족하고 있다. 1순위 만족 이유는 역시, 높은 집세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
특히 우리 가족에게 순천이 좋은 이유는 5도 2촌 생활을 즐기기 그만이라는 거다.푸른 하늘과 초록의 풍경을 마주하며 걷고 사색하며 운동하기 편한 정원 같은 도시에서 살 수 있다는 점, 이게 순천만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우리는 지난 2022년 10월 경, 우리 가족의 힐링 공간을 계획하며 싸고 저렴한 전라남도 시골땅을 구입했다. 제주에서 살던 때라 남편 홀로 주말에 육지-땅 출퇴근이 이어졌다.
하지만 제주라는 섬을 오가는 교통 비용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가족들 또한 큰 마음먹지 않으면 전라도 시골땅을 가기란 무척 힘들었다. 그런 가운데 시골땅과 차로 1시간이면 이동이 가능한 순천시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꿈꾸던 '5도 2촌', 5일은 도시에서 2일은 시골에서 사는 삶에 한 발 더 가까울 수 있게 순천시가 마중물이 된 셈이다.
다시 시작된 우리 가족의 새로운 삶에 파이팅 응원을 보낸다. 더불어 떠나온 제주,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들에도 따뜻한 안부를 전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SNS에도 게시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