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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군 백수면(현재의 백수읍) 죽사리 대궐 같은 집에 난리가 났다. 평소 남부러울 것 없던 집에 '백수특별자위대원'이 들이닥친 것이다. "반동XX들 나와!" 추상같은 호령에 집 안에 있던 이들은 한결같이 사시나무 떨듯 했다. 

완장 찬 이들이 찾는 소위 '반동'들은 이 집의 자제인 강갑수와 강한이었다. 면서기인 강갑수와 경찰 강한은 지방 좌익들이 증오하는 공무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한은 한국전쟁 당시 여수에서 경찰을 하고 있었기에 집에 없었다. 하지만 강갑수는 영광군 내의 다른 공무원이나 우익인사처럼 전황(戰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제때에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다. 골든타임을 놓친 것이다.

특별자위대원들은 사랑방, 안방, 골방, 창고를 다니며 장롱, 천장, 쌀 뒤주를 죽창으로 내질렀으나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지 못했다. 그런데 뒤란의 장독대 근방에 다른 색깔의 흙이 깔려 있는 것을 미심쩍어 한 이의 예리한 눈빛이 문제였다.

"저기를 찔러 봐" 죽창으로 장독대 옆을 찌를 때였다. "잠깐만요" 긴급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대궐 같은 집의 자제 두 명이 땅속에서 두더지처럼 나왔다. 

완장 찬 이들이 먹잇감을 찾자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확인해 보니 강갑수와 그의 동생 강연수가 있었다. 그들은 여수에서 경찰을 하고 있는 강한 대신에 연행해갈 타깃이 필요했다. 결국 그들은 '꿩 대신 닭'이라고 강한 대신 강연수를 연행해갔다. 자신들이 목표한 머릿수를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자식에 이어 부모까지
 
 전남 함평군 불갑산 지구에서 발견된 성인과 어린이의 고무신.
 전남 함평군 불갑산 지구에서 발견된 성인과 어린이의 고무신.
ⓒ 진실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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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된 이들은 죽사리 옆 마을인 천마리 대통머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북한군이 백수면을 점령하고 있던 1950년 8월 6일이었다.

생때같은 자식 둘을 잃은 백수면 죽사리 기와집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남부러울것 없이 살던 집에 자식 두 명에게 변고가 생겼기 때문이다. 입신양명이랄 것은 없지만 지방공무원에 두 명이나 임용돼 마을잔치를 벌인 게 어제 같은 데 말이다.

더군다나 경찰 신분으로 여수에서 근무하던 강한 역시 무소식이었다. 아무리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그건 평화시에나 할 소리였다. 얼마전 영광면(현재의 영광읍)이 수복됐다고 하는데, 백수면은 아직까지 인민군 세상이었다. 경찰의 치안이 백수면과 염산면에는 미치지 못할 때였다.

대궐 같은 기와집에 변고가 생긴 지 80여 일이 지난 뒤였다. 한 무리의 불청객이 솟을대문을 넘었다. "강한이 나왓!" 강한이 백수면 집에 오지 않은 것을 뻔히 아는 이들이 있지도 않은 이를 찾은 것이다.

"이 집 아들 어딨소?" 기와집 주인 내외는 신발을 신은 채 대청마루에 서서 호령하는 이들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여기 안 왔어라우"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간부로 보이는 불청객이 "강영진 동무는 왜 우리들에게 협조를 하지 않는 거요?"라며 얼굴을 붉혔다. 그들의 진심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집에 여유있는 곡식도 없었지만 자식들을 죽인 이들에게 금전과 식량을 줄 마음도 없던 차였다. 결국 자식 두 명을 잃은 지 80여 일 만에 강영진·이귀례 부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것도 하필 자식들이 죽임을 당한 천마리 대통머리로 끌려갔다. 1950년 10월 29일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왜 자위대원들은 죽사리 강갑수 형제를 죽이고 또다시 그 부모를 학살했을까? 사실 강영진 내외의 죄(?)라고는 잘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주나 부자는 그들의 적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런 죄 없는(?) 이들을 학살한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인민위원회와 빨치산에 비협조적이었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군경 수복 전에 '반동의 씨'를 말리겠다는 것이 그들의 진짜 속내였다. 

1950년 10월, 전남 영광군 백수면을 장악한 유격대(빨치산)와 마을자위대는 당(조선로동당)이 숙청대상을 결정하면 이를 집행하는 역할을 했다. 이 숙청과정에서 '반동'의 범주에는 가족들까지도 포함됐다. 복수의 씨앗(근원)을 없애자는 것이다. 

불갑산

1946년 '10월 사건' 때 영광에서는 영광·홍농·군남면에서 상당히 큰 규모의 시위가 있었고, 시위 군중 12명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 이후 영광의 좌익세력은 더이상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고, 또 상당수가 수배령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이후 영광의 산간지역에서도 빨치산 활동이 활발해졌다. 영광에는 불갑산, 태청산, 구수산 등 빨치산 거점으로 이용될 만한 산들이 많았다. 특히 불갑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이 활발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 6사단 15연대는 1950년 7월 23일 영광을 점령했다. 이들은 점령 직후 인민재판을 열고 군수·읍장·은행장 등 우익인사들에 대한 처형을 감행했다. 좌익에 의한 민간인 피해는 군경이 수복작전을 시작한 후 더욱 극심했는데, 영광 지역은 군경 수복이 늦어지면서 후퇴했던 좌익들이 다시 마을에 돌아와 군경가족이나 우익가족, 빨치산에 비협조적인 주민들을 살해했다.

한편 마산·부산 등으로 후퇴했던 전남 경찰은 10월 3일 광주를 수복한 후 각 지역별 수복작전에 돌입했다. 영광 경찰은 다른 지역보다 늦은 10월 21일께 영광을 수복했다. 영광 지역 수복이 이처럼 늦었던 이유는 9․28 서울수복 이후 지리산 방면으로 빠지지 못한 전남·북지역 빨치산들이 여차하면 바다를 통해 탈출이 가능한 영광으로 몰리면서다.

다른 한편 국군 제11사단이 1950년 말부터 '전남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공비(빨치산) 토벌작전에 임했다. 이 과정에서 군경은 영광지역 수복작전을 벌이면서 지역 주민을 '빨치산' 또는 '부역자'로 몰아 어떠한 조사과정이나 적법절차 없이 살해했다(진실화해위원회, '전남 영광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1)-불갑면', 2022).

5세부터 60세까지
 
옴팍골 불갑지서에 구금되어 있던 이들이 학살된 옴팍골
▲ 옴팍골 불갑지서에 구금되어 있던 이들이 학살된 옴팍골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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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죽인댜." 정월 대보름을 하루 앞둔 날,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에서는 불길한 소문이 퍼졌다. 그 소문은 비단 모악리에서만 퍼진 것이 아니었다. 불갑산 인근에 있는 불갑면과 묘량면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대보름날 군경이 불갑산과 인근지역을 토벌한다는 것이었다.

불갑산 산간마을에 거주하고 있던 주민들은 그동안의 경험에 비춰 자신들이 마을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는 큰코 다칠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기에 난세에는 깊은 산으로 피신하는 것이 왕도라는 생각에 짐을 싸 불갑산으로 향했다. 1951년 1월 19일이었다.

불갑면 모악리 사산마을 장현섭 일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장현섭(34세) 내외와 그의 어머니 나O산(60세), 아들 장O수(5세) 등이다. 이들이 인산인해를 이룬 불갑산의 군중 대열에 떠밀려 피난 간 곳은 불갑면 자비리였다. 

자비리에는 장현섭 가족이 마음 편히 다리를 뻗을 공간이 없었다. 소나무를 베어 기둥을 삼고 옷가지로 밤이슬만 가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곳도 아주 잠깐만의 휴식처에 불과했다. 군경의 일명 '대보름작전' 때문이다.
 
 1951년 2월 20일 토벌 작전 작전도.
 1951년 2월 20일 토벌 작전 작전도.
ⓒ 진실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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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사단 20연대 군인과 영광경찰서 소속 경찰이 2월 20일부터 25일까지 불갑산 일대와 인근 마을을 다니며 '인간 사냥'을 한 것이다. 군경토벌대는 옥석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적인 사살과 연행을 일삼았다. 장현섭 일가족은 불갑면 자비리 논동마을에서 군인에게 붙잡혀 불갑지서에 구금됐다. 장현섭은 불갑지서에 구금된 지 나흘 만에 지서 뒤편에서 총살됐다.

나머지 가족들은 지서에 구금된 다른 이들과 함께 다음날인 2월 25일 옴팍재에서 총살당했다. 이틀 사이에 장현섭의 5살짜리 아들부터 60세 어머니까지 죽임을 당했다. 

군경은 이들을 빨치산을 도왔다는 혐의로 죽였겠지만 5살짜리 아이와 60세 노모가 무슨 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북한군 점령시에 지방 좌익이 우익과 그 가족들을 죽일 때의 상황과 똑같았다. 어쩌면 이토록 역사의 극단적 상황에서 극좌와 극우는 같은 모습일까?

개똥이

대보름작전 무렵 불갑면 모악리에 살던 개똥이네 아홉 식구는 불갑산으로 피난을 갔다. 대보름작전 있기 닷새 전이었다. 작전이 있기 전부터 경찰들이 민간인을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피난 온 사람들에 떠밀려 개똥이네 할아버지와 아버지, 삼촌이 제각기 헤어졌다. 

그런 후에 개똥이 아버지는 둘째 부인이 있는 광주로 피신을 갔다. 개똥이는 아버지와 헤어진 후에 할머니, 어머니, 누나와 함께 증조할머니가 있는 영광군 묘량면 삼학리로 피난을 갔다. 

모악리가 불갑산 밑이라 밤이면 빨치산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어서 피난을 간 것이었는데 증조할머니가 세 사람(개똥이와 그의 어머니, 누나)에게 자수를 권했다. 개똥이 가족 3인은 묘량지서에 자수를 했고, 묘량지서에서 불갑지서로 이송됐다.

불갑지서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경찰은 개똥이를 포함한 어린이를 놔둔 채 어른들을 "좋은 곳으로 데려간다"면서 데리고 나갔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3세였던 개똥이가 엄마와 떨어지는 것이 싫다며 울어댔다. 

개똥이가 계속 악을 쓰며 울어대자 경찰은 그를 엄마의 품에 안겼다. 3살짜리 개똥이가 엄마와 함께 옴팍골에서 저세상으로 간 것은 대보름작전 닷새 뒤인 1951년 2월 25일이었다. 모악리 정씨 집에서는 딸만 내리 낳다가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귀한 자식이라서 일부러 '개똥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귀한 자식 개똥이는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졌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9년 7월 16일 전남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가정마을 뒷산에서 '불갑산 민간인 학살사건'의 희생자들의 유골 100여구를 공개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9년 7월 16일 전남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가정마을 뒷산에서 '불갑산 민간인 학살사건'의 희생자들의 유골 100여구를 공개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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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략결혼

불갑지서 뒤편에서 학살된 장현섭의 사촌 장현철도 대보름작전 때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자신의 아내 오순애(34세)가 옴팍골에서 경찰에게 학살당했고, 아버지 장삼팔은 함평군 해보면 문장지서에 구금됐다. 천만다행으로 장삼팔은 지역 주민들의 구명운동으로 오래지 않아 문장지서에서 석방됐다.

그런데 장현철은 대보름작전 후 마을에 숨어 있다가 불갑지서에 붙잡혀 혹독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그래도 그는 자식을 봐서라도 힘을 내야 했다. 아들 둘, 딸 둘이 딸려 있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아이들을 키울 수 없어 장현철은 39세의 늦은 나이에 재혼을 했다. 그가 19살 차이가 나는 20세의 여성을 맞이한 것은 1953년도였다. 그렇다면 20세의 꽃다운 여성은 자식 넷이 딸린 39세 홀아비와 왜 결혼했을까?

그녀는 1950년 10월 29일 영광군 백수면 천마리 대통머리에서 학살된 강영진의 딸이었다. 대궐 같은 기와집에 살던 그녀는 부모와 오빠들이 지방 좌익에 의해 학살된 후 천애고아가 됐다. 결국 그녀는 난세에 살아남기 위해 정반대의 입장에 있던 집안과 정략(?) 결혼을 한 것이다. 군경에 의한 피해 유가족과 지방 좌익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의 자식이 결합한 것이다.

#불갑산#대보름작전#불갑지서#대통머리#개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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