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원으로 일해온 경력이, 총 합하면 올해로 13년 차다. 그런데 며칠 전 불쾌한 어떤 일을 겪으면서, 과거의 좋지 않았던 경험이 저절로 떠올랐다.
10여 년 전,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 여느 때처럼 간단히 끼니를 때우려고 편의점에 들렀다. 먹을거리를 골라 계산대로 향했는데 마침 들어온 다른 손님이 나보다 앞서 계산원에게 담배를 달라고 했다. 응대하는 계산원의 발음을 들으니 아마도 중국인 유학생인 것 같았다. 그런데 손님이 다짜고짜 대뜸 이렇게 시비를 걸었다.
"너 짱X(중국 요리나 중화권 사람들을 비하하는 단어)야? 너네 나라 애들은 근성부터 틀려먹었어."
그 말을 듣자 계산원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입가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서비스용 미소. 그 끝자락에서는 이런 말을 자주 들었는지, 지겨움이 섞인 분노가 엿보였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하! 짱X를 짱X라고 부르지 뭐라고 하냐?"
손님은 우습다는 듯 모욕적인 언사를 아무렇지 않게 이어갔다. 뒤에서 듣던 내가 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하여튼 짱X 주제에 자존심만 쎄가지고. 너네는 그놈의 중화사상이 문제야. 웃기지도 않다니까."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계산원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미간에 주름 하나 없는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그가 무언가를 힘겹게 억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잠자코 듣던 그는 강하게 받아쳤다.
"한국 학생도 외국에서 이렇게 차별받으면 좋겠어요?"
사실 그 말은 내가 하고 싶어서 속으로 수백 번 되뇌던 말이었다. 상상 속에서는 이미 내가 손님의 말을 자르고 내 또래인 계산원을 옹호했지만, 현실에서는 달랐다. 비겁하고 소심한 내 자아가 '네가 저 아저씨를 어떻게 상대하려고 그래. 그러다 너까지 욕먹어'라며 내 입을 틀어막았다.
손님은 계산원의 항변에 별 다른 대꾸도 없이 담배를 챙겨 편의점을 나가버렸다.
나는 차마 계산원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쭈뼛대며 계산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 개입도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불의를 옹호하는 꼴임을 알았음에도 끝까지 방관자로 있던 내가 부끄러웠다. 불시에 모욕을 당한 그를 지켜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그가 삼각김밥과 간식거리를 하나씩 집어가며 바코드를 찍는 동안에도 수없이 고민했다.
"저 사람 말 신경 쓰지 말아요.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뒤늦게라도 이렇게 말하면서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계산이 끝날 때까지 상상은 상상으로만 머물렀고, 실제로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계산원이 기운 없이 내뱉은 "안녕히 가세요"라는 인사말을 뒤로하며 도망치듯 편의점을 벗어났다. 그의 충혈된 눈은 학업과 알바를 병행하는 피로 때문이라고, 끝내 나의 비겁함과 그의 상처를 과소평가하며.
이 찰나의 경험이 이리 오래 기억에 자리 잡을 줄은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오래된 일이라 세세한 부분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 장면의 분위기와 내적 갈등 속에서 치솟던 긴장감은 여전히 나를 괴롭힌다.
나도 참 소시민이라는 자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뒤에도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나처럼 행동했을 거라고 번번이 합리화하고 죄책감을 무마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바로 일주일 전, 이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야만 하는 일을 겪었다.
그저 머리를 잘랐을 뿐인데
날이 더워 나는 목덜미와 귀가 시원하게 드러난 쇼트커트(일명 숏컷)로 자르고 출근했다. 그런데 이날, 날 보자마자 한 마트 직원이 왜 이렇게 바보처럼 잘랐느냐고 물었다. 또 어떤 분은 내게 너무 짧게 잘랐다고 이전이 낫다고 하셨다.
나는 개의치 않으려 했다. 머리를 짧게 자르면 가끔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알았다. 그래도 나만 편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를 아는 사람을 넘어, 처음 보는 손님들까지 나에게 한 마디씩 건네기 시작했다. 얼핏 보고는 남자인 줄 오해했다는 얘기. 그러다 내 목소리를 듣고 여자임을 알아보는 식이었다.
"여자였어? 난 또 남자인 줄 알았네."
차라리 "여자여, 남자여?" 물어보면 나았다. 어떤 분은 무안할 정도로 내 얼굴을 대놓고 뜯어보았다. 별 신기한 광경을 다 본다는 식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기분 따위는 가뿐히 무시했다.
그러나 대부분 얼굴이 주름살이 잡힌 분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하는 말이었기에 '저 나이대면 성별에 고정관념이 강할 수밖에 없지' 여기며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웃음으로 넘겼다.
어떤 분은 급하게 나를 부른다는 게 '총각'이라고 했다. "총각, 저기 무시(무) 좀 갖다 줘"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들은 다른 동료 계산원이 크게 웃었다.
"총각이 아니라 아가씨에요! 하하하!"
무안했다. 점점 마음이 지쳐가던 중 이번엔 한 아주머니가 갑자기 화살을 날렸다.
"머리를 왜 저렇게 잘랐대? 얼굴도 꼭 남자 같아, 호호."
명백하게 내 외모에 대한 평가였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 외모 평가가 얼마나 무례한 건지 잘 모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단지 머리를 잘랐다고 하루 만에 이렇게 많은 공격이 날아올 줄은 몰랐다.
그런데 의외의 사람이 전혀 기대하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그 주인공은 내가 조금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상냥한 여자 손님이었다. 그 분은 늘 우유를 계산대에 올려놓으며 "저는 이렇게 골랐습니다, 헤헤" 하고 어수룩하게 웃었다.
40대 초중반 즈음 됐을까, 나보다 나이는 더 많아 보이는데도 내게서 잔돈을 받을 땐 꼭 나를 '언니'라고 했다. "고맙습니다, 언니.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하고 말하곤 했다. 어느 날엔가는 '고맙다'는 말 대신 끝을 부드럽게 늘인 억양으로 계산대에서 "사랑합니다아~"라며 인사한 뒤 떠난 적도 있다.
옷차림만 봐도 늘 헐렁하게 늘어진 티셔츠와 면바지, 뜨개질 모자에서 변하질 않았다. 더구나 그분이 가까이 오면 체취가 풍겼기 때문에, 솔직히 그리 반가운 손님은 아니었다.
이날도 여느 때처럼 이 손님이 우유를 계산대에 올리고 있는데 바로 앞 손님이 장바구니를 챙기고 나를 보며 "왜 저렇게 머리를 짧게 잘랐대. 남자인가 헷갈리게"라며 혀를 차셨다. 순간 울컥했다. 그런데 내가 속으로 어딘가 모자란 분이라고 생각한 그 손님이, 뒤에 서 있다가 나섰다. 그는 웃으며 되받아쳤다.
"여름인데 짧으면 시원해 보이고 좋지요, 헤헤."
그 말 덕에 다들 맞장구치기 시작했다. 자칫 기분 나빴을 상황이 한 번에 정리되었고 모두 아무 말 없이 떠났다. 어리석은 내 안목으로 부정적으로 판단했던 그 손님은, 십수 년 전 나는 물론, 꽤 성장했다고 자부하는 지금의 나도 잘은 하지 못하는 일을 쉽사리 혹은 세련되게 해내는 참 귀한 손님이었던 거다.
배경처럼 서 있는 사람들이지만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 속 계산원은 어디나 있다. 늘 배경처럼 서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럴까. 다들 그를 쉽게 본다. 어떤 면에선 이해가 간다. 계산원은 손님의 편의를 봐주는 게 우선인 사람이니까.
그러나 이런 친절이 당연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계산원의 친절은 어디까지나 손님을 위한 것이지, 상대를 만만하게 대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런 점은 간과하고 계산원을 인격체로 존중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내가 서글서글한 눈매가 아니라 갈고리눈의 소유자였다면,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아니라 억센 목소리였다면, 입가에 미소가 아니라 단호함을 물고 있었어도 과연 똑같은 공격을 받았을까. 아마 아니지 않을까.
상사 대하듯 어려워해 달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동등한 사람으로만 대해주길 바랄 뿐이다. 아무리 각박하고 몰인정한 사회라 해도 그 정도가 무리한 욕심은 아니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