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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보지 못한 사람의 소식을 들었다. 스물한 살 젊은 나이에 백혈병으로 투병하고 있다. 특성화고를 졸업하기도 전에 케이엠텍이라는 공장에 다녔다. 대한민국 최고 삼성전자의 1차 하청업체였다. 갤럭시 폰을 조립하다가 백혈병에 걸렸다. 아버지는 "우리 아들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한 죄밖에 없다"고 했다. 그 말이 무겁고 쓸쓸하다.

현장실습으로 나간 회사가 알고보니 죽음의 일터인 것은 이미 익숙한 이야기다. 값싸게 쓰다가 책임져야 할 순간이 오면 모두가 뒷짐을 지는 것까지 한결같다. 피해자는 항암치료를 위해 휴직한 지 4개월 만에 회사로부터 퇴사 통보를 받기도 했었다. 일학습병행제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영진전문대는 피해자에게 사실상 퇴학 처분을 내렸다. 속한 곳 어디에도 도움을 구할 수 없었다. (한편 학교 측은 "퇴학조치가 아닌 자퇴"이며 "우리 대학에 편입학할 수 있도록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편집자 주)

배신감이 컸을 것이다. 이른바 실업계 진학을 고민하는 학생에게 '선취업 후진학'은 매력적인 유인책이다. 가정형편과 꿈을 저울질하던 이들에게 생계와 대학학위를 함께 보장받을 길은 많지 않다. 더구나 남학생이었다면, 산업기능요원으로 편입해 병역을 해결할 수 있다는 소개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나는 그를 만나보지 못했지만, 비슷한 삶의 궤적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특성화고 학생/청년에 대한 정책은 어떻든 그만두지 못하게 하는 데 방점이 찍혀있다. 모든 유인책은 아무리 열악한 직장이라 하더라도 계속 다니도록만 종용하고 있다. 수많은 장학제도가 퇴사 시 환수를 조건으로 걸고 있고, 자산형성을 지원한다는 많은 정책도 3년이라는 시간을 저당잡는다. 이 많은 제도는 진짜 우리를 위한 건가?

일학습병행제로 학교 가는 토요일, 회사는 특근을 빼주면서 내 꿈을 지원하는 듯 말했다. 그러나 진실은 내 의사와 무관하게 나를 학교로 보낼 때, 회사는 내 인건비의 상당액을 보전받는다. 최저임금보다도 훨씬 싸게 풀타임 직원을 부린 셈이다. 그렇게라도 고졸자를 '껍데기만 대졸'로 둔갑시키는 게 지금의 제도다. 그러면 우리는 통계 밖으로 벗어난다.

조금 달라졌다고 하지만 산업기능요원 제도도 철저히 회사의 편의에 맞춰 운영된다. 나는 회사가 소위 '산업특례병'으로 지정해 줄 때까지 1년가량 일하며 기다려야 했다. 길어지면 2년까지도 기다린다. 편입 후에도 못 견뎌 중도퇴사하면 복무 기간의 1/4만 인정해줘서 남은 기간을 현역으로 채워야 했다. 그래서 뭘 못할 때마다 "군대 보내줄까?"란 말을 들어야 했다. 진로가 연관돼 있으니 대학생 보충역처럼 돈이나 많이 주는 아무 생산직 공장에 갈 수도 없었다.
 
 지난 5월 케이엠텍 정문 앞에서 백혈병 산재 책임촉구 기자회견이 열렸다.
 지난 5월 케이엠텍 정문 앞에서 백혈병 산재 책임촉구 기자회견이 열렸다.
ⓒ 대구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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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당 잡힌 청춘', 익숙한 이야기다. 병역이 아니라 꿈을 기준으로 놓고 이야기해도 마찬가지다. 헤어 스타일리스트나 패션어시 노동자들... 있는지 알 수도 없는 미래를 볼모로 청춘을 빼앗기는 모습들. 쉽게 상상할 수 있듯 우리는 철저하게 을의 입장에 서 있다.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짧고, 업무 숙련도가 떨어지고, 목돈이 없고, 무슨 일이든 계속하긴 해야 하는 집 안팎의 상황들까지.

학위와 생계, 병역을 결정하는 회사에 부당한 걸 따져 묻기는 쉽지 않다. 일이 이상한 것 같아도, 몸이 상하는 것처럼 느껴져도. '피곤해서 그렇겠거니' 넘기기가 일상이다. 부당한 일을 겪어도 참아야 한다. 당신도 나도 냄새가 나는데 마스크 한 장 쓰는 게 고작이었다. 공장 다닐 때 옆 부서 형이 그랬다. 유난히 괴롭히는 상사가 있다고 푸념하길래 회사에 얘기해보라니, "너 같으면 일 잘하는 과장이랑 나 중에 누구 편들 거 같은데?" 했다.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오나. 많은 제도는 '그렇다'고 말한다.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하지만, 그 아버지의 말대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한 죄밖에 없다.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차라리 그만뒀다면...' 한다. 그만두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 삶이 나아질 거라고 기대했을까. 그 결과로 돌아온 백혈병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정말로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오는가? 안 아픈 데가 없는 할아버지 대리님은 오늘도 나이 어린 이사한테 욕먹어 가며 일한다.

삼성전자는 작업환경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청업체인 케이엠텍도 업무상 질병으로 볼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그만두지 않고 열심히 일했더니 '어쩌다 아픈 걸 어쩌냐'고 한다. 차라리 그만두자니 정부는 실업급여액을 줄이겠다고 한다. 게을러질까봐 그러는 걸까? 게으른 것도 죄고, 열심히 일하고 공부한 것도 죄다. 죄짓지 말고 살라 했는데. 어떡해야 할지 고민이 많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이학선은 대구청년유니온 조합원이자 특성화고 졸업생입니다. 이 글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7, 8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청년#현장실습#특성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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