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8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회적 정년을 맞아 은퇴한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먹고 살기 위해 다시 노동시장으로 회귀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평균 은퇴 나이는 72.3세다. 정년은 비자발적 실업이며 경력 단절일 따름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늦은 나이까지 일하는 나라다. 우리 시대의 은퇴란 무엇인가. 생애 후반부는 어떤 모양으로 조각해야 하나. 인생 곡선은 어떻게 그려야 할까. 이글은 퇴직과 정년, 은퇴와 수명이라는 변곡점을 통과하는 중년/장년/노년의 고령자들이 좋은 삶(good life)을 살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성찰하기 위해 기획된 것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기자말] |
이 그림은 세대별 인구수를 나타낸 것이다. 60대는 1차 베이비붐 세대, 50대는 2차 베이비붐 세대에 속한다. 두 세대를 합하면 1700만 명에 육박한다. 우리나라 인구(5163만 명/2022년 기준)의 3할이 넘는 수치다. 산업화 세대의 자녀 세대가 X세대, 1차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 세대가 Y세대다.
1차 베이비붐 세대는 사회적 정년이 지났고, 곧 2차 베이비붐 세대의 퇴장이 시작된다. 한 세대가 물러가고 다음 세대가 그 자리를 메우는 건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 '들고 남의 순환 체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 자녀 세대의 진입은 더디고, 부모 세대는 방향을 틀어 되돌아오는 형국이다. '저성장+고령화 시대'가 낳은 난맥상이다.
세대 간 갈등의 골도 깊다. 청/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노인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87.6%, 노인과 청/장년층 간 갈등이 심하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80.4%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인복지가 확대되면 청년층 부담이 늘어날 것으로 우려된다는 질문에 대해 77.8%가 동의했으며, 노인 일자리가 늘어나면 청년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 우려된다는 문항에도 55.4%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같은 세대와 연령대 안에도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 사회학자 신진욱의 말처럼, 직업, 소득, 재산, 학력, 성별, 지역 등의 차이를 무시하고 한 세대를 동일 묶음으로 바라보는 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왜곡, 은폐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불평등은 전 세대에 고루 퍼져 있는 현상이다.
50년 후인 2072년의 인구 구성은 어떻게 될까. 통계청 추계에 따르면, 총인구 중 0∼14세가 6.6%, 15∼64세가 45.8%, 65세 이상이 47.7%에 이르게 된다. 국민 절반이 노인이라는 뜻이다. 중위연령은 44.9세(2022년)에서 63.4세로 늘어난다. 출생아 수는 25만 명(2022년)에서 16만 명으로 줄어들고, 사망자 수는 36만 명(2022년)에서 69만 명으로 증가한다.
생산연령인구도 3674만 명(2022년)에서 1658만 명으로 급락한다. 생산연령인구 100명당 부양할 인구는 40.6명(2022년)에서 118.5명으로 3배 가까이 증가한다. 젊은이 1명이 늙은이 1.8명을 등에 업고 사는 형세다.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2025년에 1000만 명을 넘어서고 2072년에 이르면 1727만 명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2072년은 올해 고등학교 2학년인 학생(2007년생)이 65세에 도달하는 해다. 이들은 자신들의 노후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자신들이 태어난 조국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많은 노인을 부양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내하려 할까. 그런 세상을 물려준 선배 세대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게 될까.
당장 내일을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50년 후는 너무 먼 미래다. 지금 이 기사를 읽는 장년층 가운데 2072년에 생존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건 말건, 나라가 망가지건 말건, 죽기 전까지 혹은 죽은 후에도 나와 내 가족이 잘 살면 그만이다. 출산율이 낮아진 건 내 탓이 아니다.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은 따로 있다.
정치가들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뿐, 미래를 예비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밀알이 되고자 하는 '참' 정치인은 잘 보이지 않는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이 난국을 해결할 국가 차원의 대개혁을 주창하는 이가 없다. 침몰하는 배 위에서 탁자를 정리하는 오류를 범하면서도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를 모른다.
그렇다고 당신과 나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건 아니다.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만 급급해 사회와 공동체를 팽개치고 살아온 무책임. 눈먼 자들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나 몰라라 하며 지낸 죄가 무겁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새천년이 시작된 첫 오십 년을 가리켜 '무능의 시대'였다는 꼬리표를 붙여도 달리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화석 연료를 기반으로 작동되는 시스템의 유효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성장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지금은 '탈성장의 시대'다. 성장하지 않고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쉽사리 해법을 찾기 힘든 고차함수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 우리가 살아갈 날은 살아온 날보다 힘겨울 것이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생애주기도 바뀌고 있다. 인생 곡선이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쌍봉낙타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정년과 은퇴 후에도 살아갈 날이 길게 남아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자. 탄소 발자국을 줄이고, 공익을 위해 일하는 단체를 돕고, 미래를 밝힐 지도자에게 표를 주자. 다음 세대를 위해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매킨타이어(A.Maclntyre)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려면, 그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지를 아는 것. 이 서사적 탐색이 우리의 남은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줄 것이라 믿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문진수 시민기자는 최근 단행본 '은퇴의 정석'(2024.6.28/한겨레출판)을 출간했습니다. 이 기사는 책의 내용을 일부 인용, 재편집해 새로 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