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딸아이(초등 4학년)와 어린이집을 같이 다녔던 아이와 아이의 엄마를 우연히 만났는데, 아이가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다가?"
"저 앞 사거리에서 장난치면서 걷다가 길이 파인 걸 못 보고 발을 헛디뎠어요."
이 더위에 다리에 저렇게 깁스를 하고 지낸다는 게, 아이한테도 엄마한테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물었다.
"아이고, 많이 아팠겠다. 엄마도 힘들겠어요. 참, 구청에는 연락해봤어요?"
"네? 구청에는 왜요?"
"아, 구청에서 보통 '영조물배상책임보험'이라는 걸 가입하거든요. 시민들이 지자체에서 관리하는 시설물의 하자로 인해 다쳤을 때 보상받을 수 있는 보험인데요. 움푹 파인 도로가 아무런 조치 없이 방치돼 있는 상태에서 아이가 다쳤다면, 지자체에서 관리를 소홀히 한 책임이 있으니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어요."
"그런 게 있었군요. 전 조심성 없다고 아이 탓만 했는데... 듣고 보니 지자체에도 잘못이 있었네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딸을 다치게 한 물놀이터... 지자체엔 시민들을 위한 보험이 있다
내가 영조물배상책임보험을 알게 된 건 작년 여름, 집 근처 공원에 워터파크 뺨치는 물놀이터가 생긴 직후였다. 나는 작년부터 '굳이 무더위에 사람 많은 휴양지에 가서 고생을 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어 여름에는 여행을 가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이가 여름방학에 집에만 있는 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집에서 5분 거리에 생긴 물놀이터라니. 나를 위한 선물 같았다.
물놀이터를 처음 개방한 날, 딸아이와 함께 물놀이터를 갔다. 아이가 친구와 함께 물놀이터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나무 그늘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봤다.
미끄럼틀 꼭대기에 걸린 커다란 통에 물이 차면서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하다가 어느 순간 한쪽으로 쏠리며 폭포처럼 물이 쫘악 쏟아져 내릴 때는 나도 아이들과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들이 신나게 놀며 웃는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도 동심으로 돌아간 듯 설레고 행복했다.
집 근처에 이렇게 좋은 휴양지가 생겼으니 이번 여름은 아이한테 미안해하지 않고 편안하게 보내야겠다며, 나만의 방콕 휴가를 보낼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내 꿈은 단 이틀 만에 부서지고 말았다.
두 번째로 물놀이터에 놀러 간 딸아이가, 나간 지 30분도 채 안돼 돌아왔다.
"왜 벌써 왔어?"
"미끄럼틀 타다가 발목 다쳤어."
딸아이가 탄 미끄럼틀의 속도가 너무 빨라 착지를 할 때 발목이 꺾였다고 울먹였다. 발목이 많이 부어있었고, 만지면 많이 아파했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아이고, 복숭아뼈 골절이었다. 의사는 말했다.
"최대한 움직이지 못하게 하세요. 아이들이 가만히 있질 못해서 뼈가 제대로 붙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깁스를 더 오래 해야 하고, 성장판 손상이 올 수도 있어요."
그날부터 나는 성장기인 데다 심심하기까지 해서 시도 때도 없이 먹을 걸 찾는 아이의 먹거리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딸아이가 아침을 먹은 지 한 시간 뒤에 배가 고프다고 해서 떡볶이를 만들어 대령했다. 물 달라고 나를 부른다. 잠시 후에 물을 엎질렀다고 나를 부른다.
잠시 후에 또 간식, 이거 달라 저거 달라, 그러다 또 저녁... 물놀이터가 생겨 편안하게 보낼 줄 알았던 내 여름은, 다리를 다쳐 움직이기 힘든 딸아이의 수발을 드느라 괴로운 여름으로 변해 버렸다.
딸을 다치게 한 물놀이터가 원망스러웠다. 딸이 탔던 미끄럼틀은 옆으로 살짝 비틀어졌다가 아래로 내려오는 형태였는데, 거기서 너무 빨리 아래로 미끄러져 발목을 다쳤다면 그건 미끄럼틀 자체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공원 시설물의 문제로 다친 경우를 검색해 보다가, '영조물배상책임보험'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영조물이란? 조금 어려운 말 같지만,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특정 공공 목적으로 제공한 시설로 도로, 교통표지판, 맨홀, 보도블록, 가로수, 공원의 운동기구 등 시·군·구에서 관리하는 시설물을 말한다. '영조물배상책임보험'은 이런 시설물의 하자로 인해 신체 부상이나 재물의 손해를 일으켜 배상책임이 발생하는 경우를 대비해 지자체에서 가입해두는 보험이다.
다른 사람도 다칠 수 있다
딸아이의 경우, 공원 시설물(미끄럼틀)의 하자로 인해 다친 것이고, 영조물배상책임보험의 청구 대상이 된다고 판단했다. 보상금도 보상금이지만, 우리 딸처럼 다른 아이도 다칠 수 있으니 그러기 전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구청에 전화를 걸었다.
구청 담당자와 이야기를 해 본 결과, 구청에서는 기존에 미끄럼틀의 각도를 다 체크하고 조정했기 때문에 시설물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 후로 가끔 물놀이터에 들러 그 미끄럼틀에서 다친 아이가 없었는지 물었지만, 거기서 또 다른 사고가 나지는 않았다고 한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물놀이터가 문을 닫은 후, 시설물의 하자는 인정되지 않았으나 안전관리상의 책임으로 구청에서 보험금을 청구해 줘서 아이의 치료비를 보상받을 수 있었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끄럼틀 한 번 잘못 탔다가 딸도 나도 여름 내내 고생한 데 대한 약간의 위로는 된 느낌이었다.
올해 7월이 되자 또 물놀이터의 문이 열렸다. 딸아이는 지난번처럼 다칠까 봐 겁이 난다며 물놀이터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딸아이한테 은근슬쩍 물놀이터 얘기를 꺼냈다.
"물놀이터에 애들 많더라. 되게 신나 보이더라."
"난 안 갈래."
"왜? 저번에 타다 다쳤던 미끄럼틀만 안 타면 되잖아."
"그래도 싫어."
완강했던 딸아이가 지난 주말, 친구의 전화를 받고는 말했다.
"엄마, 나 물놀이터 갔다 올게."
"이제 안 간다며?"
"미끄럼틀만 안 타면 되지 뭐."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이제 딸아이는 엄마 말 열 마디 보다 친구의 말 한마디가 마음을 움직이는 나이가 된 것 같다.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은 해봤자 소용없겠지. 서둘러 달려 나가는 딸아이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신나게 놀고 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브런치에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