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십오 년쯤 하면서 생긴 버릇이 하나 있다. 방학이 되면 신기술을 하나씩 배우고 써보는 것이다. 이번 여름 방학에는 챗GPT 유료 버전을 파보기로 했다. 무료 버전을 사용해도 GPT에게 질문을 하고 대답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단순 질의응답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숙제 로봇'을 만들고 싶었다. 우리 반 아이 입장에서 GPT를 가장 잘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로 한 것이다.
특정 기능을 강화시킨 '맞춤형 GPT'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플러스 Plus' 버전을 구독해야 했다. 구독료는 미국 달러로 월간 20불. 한국 돈으로는 29000원이 결제되었다. 넷플릭스 광고형 스탠다드 버전이 5500원부터 시작하는 것을 감안하면 다소 비싼 감이 있다. 그렇지만 지불할 가치가 있어 보였다.
유료 버전부터는 내가 문장을 입력하면 설명에 맞춰 이미지를 생성해 주는 DALL-E를 채팅창에서 쓸 수 있었다. '5학년 숙제 로봇'의 프로필 사진도 인공지능에게 맡기기로 했다. 더불어 GTP-4o라는 새로운 기능을 탑재한 서비스에 접근이 가능했다.
GPT4 옴니라고도 부르는 이 녀석(왠지 사람처럼 느껴지기에)은 카메라로 주변을 인식하고 상황에 맞춰 응답한다. 응답속도가 무척 빨라서 대화의 흐름이 끊기는 경우는 드물다. 대화를 하다 보면 내가 소프트웨어와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게 된다. 나는 황금열쇠를 구입한 심정으로 GPT의 문을 열었다.
'5학년 숙제 도와줘' GPT에게 요청했다
나만의 GPT를 만들려는 의지는 충만하였으나 막상 '플러스 버전'을 구독하고 나자 막막했다. 나는 프로그램을 짜는 코딩 언어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에 실과 교과에 소프트웨어 교육이 도입된다고 하여 '파이썬'이라는 언어를 배우려 시도한 적이 있다. 프로그래밍 언어 중에서는 나름 문법이 간결하고 쉬워 입문자가 다루기 편하다는 평가를 들은 터였다.
초심자용 언어라고 편하게 접근했던 '파이썬'은 결코 쉽지 않았다.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코드를 짠다는 것은 매우 정교한 규칙 아래 논리적으로 생각을 풀어놓는 행위에 가까웠다. 코딩을 하려면 개발자처럼 사고하고 표현하는 훈련이 필요했다. 나는 한 달도 못 되어 '파이썬' 공부를 놓았다. 이후 초등학생용으로 개발된 블록 코딩 프로그램 연수를 받는 것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괜히 GPT를 유료로 구독했나, '파이썬'의 악몽이 떠올랐다. 그래도 시도나 해보자 싶어 'GPT 만들기'를 눌렀다. 복잡한 코드가 나올 것 같아 잔뜩 긴장했지만 화면은 평화로웠다. 그냥 창이 두 개로 나뉜 것뿐이었다. 오른쪽 화면은 익숙한 GPT 채팅창 같았고, 왼쪽에는 '만들기'라는 이름을 가진 채팅창이 띄워져 있었다.
여기에서는 코딩을 '말로 하듯이' 문장을 입력하면 되었다. 내가 이번에 만들려는 GPT는 '초등학교 5학년 숙제 도우미 로봇'이다. 그래서 바로 목적을 채팅창에 적었다.
<내가 원하는 gpt는 대한민국에 있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의 숙제를 도와주는 도우미야>
단 한 문장을 입력했을 뿐인데 기본 틀이 바로 만들어졌다. 대화 시작 명령어 4개가 자동으로 떴다. '초등학교 5학년 과학 숙제를 도와줘', '이 수학 문제를 푸는 방법을 알려줘' 등등. 마치 내가 어떤 메뉴를 구성하고 싶어 하는지 아는 것처럼 결과물이 나왔다.
나는 숙제 로봇이 친절하길 바랐다. 그래서 '친근하고 도움이 되는 태도로 응답해 줘. 명확하지 않은 질문이 있으면 다시 물어줘. 그리고 추가 정보를 요청하여 보다 정확한 답변을 제공해 줘'라고 입력했다. 다소 긴 요청사항이었지만, GPT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일단 여기까지 입력하고 테스트를 해 보았다.
테스트 항목은 '시 짓기'. 일부러 긴 문장을 만들어서 명령을 내렸다. 여름에 너무 더워서 동해 바다에 놀러 갔는데 바닷물이 너무 차가워서 물에 들어갔다가 감기에 걸린 일을 주제로 웃긴 시를 적어줘! 10초도 걸리지 않아 4연 8행의 시가 뚝딱 튀어나왔다.
동해 바다 놀러갔네, 여름 더위 피해봤네,
바닷물이 너무 차가워, 한 번 들어갔다 나왔네.
"으악! 이건 무슨 일이야?" 물속에서 얼어붙었네,
친구들 웃음소리만, 내 귀에 쨍쨍 들리네.
몸이 떨리고 콧물 줄줄, 감기 걸려 버렸네,
"아이고, 이게 무슨 꼴이야?" 엄마한테 혼났네.
동해 바다 참 좋았지, 더워도 물은 차갑네,
다음엔 옷 더 챙겨야지, 감기 걸리지 않게!
나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시가 꽤 괜찮았다. 어미도 통일되어 있고, 대화체가 섞여 있어 생동감이 살아있었다. 우리 반 아이가 과제로 제출했어도 웃으며 칭찬을 했을 법한 시였다. 나는 숙제 로봇을 더 업그레이드하고 싶었다.
아이들이 GPT에게 정보를 물어보면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의 이해 수준에 맞춰서 간단하고 명확한 설명을 제공해 달라고 입력했다. 그리고 보고서나 글을 작성할 때는 초등학생이 작성한 것처럼 보이도록 문장을 구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재미있는 점은 사람한테 편지를 쓸 때처럼 '부탁한다', '요청한다', '~하길 바란다' 같은 표현을 써도 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GPT 업데이트에 반영해 주었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졌다. '영화 아이언맨에 나오는 AI비서 자비스가 부럽지 않아!' 중독성이 강한 게임에 빠진 것처럼 미친 듯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영어 회화 과외를 받는다는 상황을 설정해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학생 글쓰기 첨삭을 도와주는 GPT를 제작해 보기도 했다. 너무나도 즐거웠다. 그러다 자정을 넘겨 잠들 무렵에는 '이러다 AI가 사람 일자리를 다 해 먹겠다'는 생각에 등이 오싹해졌다.
신통방통 GPT, 문득 두려워졌다
두어 시간 동안 이런저런 부분을 정교하게 다듬자 꽤 그럴싸한 '숙제 도우미 GPT' 만들어졌다. 마치 온라인 공간에 도라에몽을 창조한 기분이 들었다. 어린 시절 나는 만화 속 도라에몽처럼 최첨단 과학 기술로 무장한 로봇 친구를 꿈꿨다.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해도 척척 흔쾌히 대답을 해주고, 내 아이디어를 비서처럼 보완해 주는 친구 말이다.
숙제 도우미 로봇은 쓸 만했다. 특히 정보를 모아 정리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국어 교과서에 등장하는 각종 지문을 요약, 분석하는 것은 물론이요 온갖 종류의 글쓰기 과제를 무리 없이 해냈다. '수도권에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을 적용했을 때 한국의 미래 모습은 어떨지 보고서를 작성해 줘' 같은 사회 과제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모든 과정이 명쾌했다.
나는 문득 두려워졌다. 탁월한 AI 비서가 탄생한 것은 놀랍지만 아이들이 이 서비스에 의존하게 될까 봐,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는 노력을 게을리할까 봐 걱정이 앞섰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라고 했던가. '플러스 버전' GPT는 고급 정보 처리도 능통하다고 했으니 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GPT로 만든 숙제의 질은 괜찮은데 아이들이 자기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베껴서 제출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고.
역시나 GPT는 10초 만에 세심한 직장 선배처럼 위로를 해주었다. 공감 우선, 해결 방안은 나중에. 상담 원칙을 철저히 준수한 GPT는 내게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첫째, 학생들에게 ChatGPT의 도움을 받되, 반드시 자신의 생각과 결론을 포함시키라는 지침을 마련하기.
둘째, ChatGPT로 작성한 숙제를 바탕으로 토론이나 발표 활동 강화하기.
셋째, 숙제를 마친 후 GPT의 도움을 받았던 부분에 대해 어떤 점이 도움이 되었고, 자신의 생각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성찰 일기' 쓰기.
ChatGPT를 단순한 확률 머신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스스로 생각한 내용은 아닐지라도 결과적으로 GPT가 내어 놓는 결과물은 '자기반성적' 성격을 띠는 것처럼 보인다. 정보수집능력과 분석력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나는 교실에서 항상 오프라인 교육을 강조해 왔다. 종이책을 읽고, 연필과 펜으로 글씨를 쓰고,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표정을 읽으며 토론했다. 학생은 선생님의 열정에 찬 눈빛을 보고 성장한다고 믿었다. 특히 초등학교 단계에서는 기초 지식과 생활 습관, 태도를 배우게 되므로 오프라인에 기반한 교육에 무게를 두었다. 지금도 그 가치관은 여전하다. 그러나 GPT 유료 버전을 진지하게 다루면서 망설여졌다. 혹시 내가 아이들에게 진짜 중요한 도구를 다루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걱정이 깊어가는 사이, ChatGPT의 제작사인 오픈AI는 '서치GPT'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서치GPT'는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검색 엔진이다. 이제 인공지능은 구글과 네이버로 대표되는 검색 시장까지 장악하려는 모양새다.
교실로 돌아가면 화면을 띄워놓고 아이들과 내가 만든 '숙제 도우미 로봇 GPT'를 분해해 보려 한다. 제작 과정을 하나하나 따라 해 보면서 어떤 '프롬프트'를 사용했는지 살펴보고 직접 테스트해 보는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파헤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몇 달만 지나면 아이들이 선생님보다 더 근사한 '맞춤형 GPT'를 만들어 낼 것이다. 신기술은 어른보다 아이들이 훨씬 더 재밌게 가지고 논다. 이것은 지난 15년간 학교에서 지내며 내가 관찰한 사실이다.